최근 보건의료 화두는 단연 의대정원확대 문제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2월초 2000명이라는 큰 수의 의대정원확대를 발표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나오자마자 우리 사회는 의사들의 집단 진료거부 여부를 걱정했다. 정책의 정합성이나 이를 성공시킬 방안보다 의사집단의 저항이 초미의 관심이 된 이유는 2020년 적은 수의 의대 증원에도 진료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의사들의 저항으로 증원 자체가 철회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우선 환자들을 돌보고 살펴야 하는 의사들이 자신의 밥그릇 때문에 다른 수단도 아니고 진료거부를 선택한 것에 대한 사회적 실망감이다. 이는 의사집단에 대한 대중적 신뢰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전문직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 붕괴하는 과정의 상징이 되었다. 다음은 이로 인해 상처받은 국민들의 자존심이다. 의사는 진료실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내밀한 고통과 가족사를 공유하는 존재다. 이런 의사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진료거부를 선택했으니 국민들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의사들도 의대증원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증원 문제, 그리고 이후 충분히 수정 가능한 문제를 두고 의사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인 진료거부를 선택하는 건 윤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과도한 권력남용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이런 의사집단의 폭력성과는 별개로 개별 의사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진료실에서 의사들이 자신의 진료권으로 환자들을 윽박지르고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 동네 좋은 의사 선생님이 왜 진료거부에 동조하고 의대정원확대 이야기에서는 이성을 잃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거다. 이를 혹자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같은 도덕적 괴리 문제로 제기하지만, 필자는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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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교육, 수련, 배치의 무한 경쟁구도

모든 문제에는 다양한 원인의 축적이 존재한다. 한 집단이 광기에 노출되는 순간은 이를 촉발하는 사건 자체보다는 그  집단이 경험한 역사적 경로와 토대가 미친 영향이 더 크다. 그런 측면에서 의사집단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탈사회화 된 이유는 그 양성 교육과 의료제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의사를 양성하는 교육 자체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낙오자를 포용하지 않는 구조다. 의과대학의 유급제도는 여타 대학의 과목 낙제와 달리 학년 전체를 재수강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의학도 개개인에는 과도한 스트레스다. 특히 대부분 과목이 상대평가여서 일정 수준의 학업 성취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남보다 높은 성취를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사들은 학생 시절부터 극한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는 우수해야 살아남는다는 식의 ‘우승열패’식 사고를 주입받는 과정이며, ‘의사는 우수해야 되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존재’라는 의미까지 부여하게 된다.

여기에 한국은 한술 더 떠 의과대학 입학과정도 이런 무한경쟁으로 점철돼 있다. 의과대학은 IMF 경제위기 이후 시작된 신자유주의 광풍에서 가장 선호되는 학부다. 이공계 여타 직장의 종신 채용이 무력화 되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시점에서 유일하게 소득과 신분을 보장받는 직종으로 살아남은 덕이다. 문제는 이런 한국 사회의 기형적 시장주의가 의과대학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만들면서, 이제 입학생들은 최상위권 그것도 전국 등수 수준에 한정되었다. 입학 뒤엔 경쟁적인 의학 교육에 진입하기 위한 무한경쟁도 강화되어 왔다. 이런 두번에 걸친 고도의 경쟁을 살아남아야만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구조는 실제로 경쟁과 관련된 이질화된 양가감정을 드러내는 유발 고리가 된다. 아마도 졸업 시점이 되면, 경쟁 자체가 체화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의사가 되었다고 경쟁의 끝도 아니다. 한국은 전문의가 대부분인 나라다. 따라서 전문의 그것도 인기 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경쟁도 시작된다. 특정 인기 진료과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 삼수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문의가 되면 의료 시장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전체 의사의 반 정도는 개업해 진료하고 있는데, 개업은 철저한 시장경쟁 원칙을 따르게 된다. 개인 의원에서는 원장이 경영도 해야 되고 진료도 봐야 되고 여타 자영업자의 임무도 맡아야 한다. 이런 부분이 원할치 않아 노무관리나 금융 비용과 임대 비용 등을 잘못 계산하게 되면 망하거나 개원에 실패한다. 실제 개원 의사의 20퍼센트가량은 매년 폐업한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수가 매년 개업하는데 이는 시장주의적 여타 자영업과 비슷해진 의료공급의 단면이다.

이처럼 의과대학을 입학하고, 졸업하고, 수련 병원에서 수련하고, 개업하는 전 과정에 과도한 경쟁이 조장한 문제는 경쟁자를 이기는 문제뿐 아니라, 경쟁자를 줄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명제를 산출하게 만든다.

영혼 있는 의사를 늘리자

유럽 국가들에서 의사 수를 늘린다면 대다수 의사가 환영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럽 의사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량한 의사고, 한국 의사들은 탐욕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유럽은 학생 시절부터 입학, 수련, 배치까지 공공적이고 공익적인 구조에서 의사를 양성한다. 한국처럼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자원을 의사로 만들지 않는다. 즉 유럽은 공공적 의료체계가 경쟁적이지 않은 의사들을 양성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늘려야 하는 의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할까? 경쟁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 그리고 의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있는 공공적인 의사다. 2000명이란 큰 숫자를 기존 방식대로 늘리는 게 아니라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에서 일하는 대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고, 경쟁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 일원으로 함께할 의사를 양성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입학과정, 교육과정, 배치과정 모두가 경쟁이 아닌 공공적이고 공익적인 계획으로 진행돼야 마땅하다. 최소한 지금까지 논의된 ‘지역의사제’나 ‘공공의대’ 같은 공공적 방안으로 선발하는 게 최소한의 기준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영혼 없는 의사들을 더 많이 양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런 의사들은 이후 더 큰 집단이기주의의 화신이 되거나, 무한경쟁으로 서로를 갉아먹는 존재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젠 이런 무한경쟁 구도의 의사 양성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이번 의대증원에서 바꿔야 시민도 의사들도 모두 살 수 있다.

정형준

재활의학과 전문의,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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