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간 민영 보험사를 위시한 각종 테크 기업들은 ‘원격 의료’를 허용해 달라고 주장해 왔지만 도입되지 못했다. 진료의 안전성과 효용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문제, 의료비가 더 올라간다는 문제, 결정적으로는 쏠림 현상으로 대형 병원에 더 많은 환자를 빼앗길 거라는 불안에 의사 단체들이 저항해서 본격 도입은 지연되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어쩔수 없이 ‘비대면 진료’라는 이름으로 원격 의료가 전격 도입됐다. 코로나 치료제를 원격으로 처방해서 택배로 배송하고, 여드름 치료제, 탈모약 같은 피부미용 제제가 비대면 진료 앱을 통해 많이 팔렸다. 여드름 치료제나 탈모약은 의사의 진단이 중요한 게 아니고 환자 본인의 의지와 판단 때문에 처방되는 개인 욕구와 관련된 약품이다. 그래서 사실 의사를 직접 만날 필요가 적다.

그런데 이런 비대면이 강화되니 직접 진료를 해야 하는 필수 진료 영역은 부실해졌다. 혹자는 의사 부족이 의료 부분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최근 주장하지만, 의사가 부족해도 매년 3000명가량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는데, 최근 더 소아과 오픈런이 악화되고 응급실 뺑뺑이가 흔해지는 데는 구조적 문제가 크다. 필수적 의료서비스와 응급의료 부분에서 의사들이 이탈하고 피부미용뿐 아니라 이제는 디지털, 비대면 영역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각종 디지털화는 원격의료 자체의 확대 문제 외에도 인스타그램과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져 나가는 줄기세포 치료, 탈모 치료, 미용 치료 같은 영리적 시장 확대도 부추긴다. 이런 시장이 커져 가는 만큼 의사들은 돈을 벌러 영리적 의료 행위로 빠져나간다. 요즘은 병의원 평가도 앱에서 이뤄진다. 영화나 물건에만 별점이 있는 게 아니다. 병을 잘 진단하고 치료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고 친절하고 인테리어도 잘되어 있는 병원이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의사와 환자 사이는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다. 애초에 의료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돌봄에서 시작하는 행위다. 때문에 의료인 특히 의사를 존경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의료를 판매하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의사가 되었다고 대담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모두들 그 천박함을 비웃을 거다.

그런데 기술의학 발전에 덧붙여진 디지털화, 비대면 진료는 이런 상품판매 방식을 의료 이용의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 결과가 이제는 과거처럼 헌신과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줄어들고, 환자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명의를 찾아다니고 별점을 확인하는 과정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의료서비스는 단지 눈앞의 친절이나 깨끗한 인테리어, 의료 광고로 구현되는게 아니라, 돌봄 속에서 발전하는 데 말이다.

이런 삭막하고 건조해진 의사-환자 관계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손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피폐함의 방증이기도 하다. 때문에 다시 인간의 손길로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의료가 복원되어야 된다는 요구도 많다. 지역사회 의료 돌봄의 연계, 방문 진료 확대, 지역 재활체계 구축 등을 주장하는 풀뿌리 단체들과 헌신적인 의료인들이 여러 곳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바이오, 디지털헬스 글로벌 중심 국가’를 국정 과제로 세우면서 지역사회 의료 강화가 아니라 의료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려 한다. 발표한 5가지 세부 과제를 보면 보건안보 확립, 미정복 질환 극복, 바이오헬스 혁신, 복지 돌봄 개선, 필수의료 확충으로, 언뜻 보면 국민들의 의료 복지를 챙기는 내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부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제목과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우선 ‘바이오헬스 혁신’은 ‘거대 AI 활용 맞춤 의료’라고 한다. 실제로 인공지능을 이용한 맞춤 의료는 사회와 공동체 중심의 의료체계가 아니라 개별화된 의료체계를 말한다. 맞춤형이란 말은 그럴싸하지만, 현대 의학은 과학적이고 보편적 근거에 기반하는 의료다. 맞춤 의료는 ‘개인 의료’로 귀결되는 문제뿐 아니라 개개인의 특수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과학적 근거를 무시하게 된다. 대부분 질병은 유전자나 개인 특성보다는 사회 환경과 지역, 먹거리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인간은 각각 개성과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신체는 특수성보다 보편성에 기초한 생물이다.

여기다 ‘복지돌봄 개선’은 세부 과제를 보면 돌봄 로봇과 말벗 로봇 같은 비대면 서비스를 돌봄의 일부로 포장하고 있다. 진정한 돌봄은 이웃과 지역사회의 성원이 직접 사람들을 방문하고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인데 말이다. 이를 자동화된 대화 앱과 로봇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환상도 황당하다. 무엇보다 이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돌봄을 받을 여유가 없는 가난한 노인들에 대한 기만이다. 하지만 이런 기만책이 큰 비난과 비판 없이 정부위원회에서 논의되고 발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 자체가 디지털화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대부분도 이런 편의를 칭송하기 바뻤던 사유 단절과 척박함도 한몫했다. 하지만 정작 부자들은 이런 비대면 서비스, 돌봄 로봇, 원격 의료를 이용하지 않는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아마 훨씬 훌륭한 대면서비스와 사교 모임에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를 빠르게 만들고 있는 ‘IT혁명’으로 돈 버는 사람들은 정작 이러한 비대면 문화에 빠져들지 않고 있다. 사람의 삶과 생명을 돌보는 보건의료까지 디지털화에 빠지는 세상이다. 다시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사람을 만나서 차 한잔 마시는 것의 의미를 재인식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무한 상품화를 부추기는 영혼 없는 권력이 이 모든 환상의 근간이다. 사람과 돌봄을 중심에 놓는 정치가 시급하다.

정형준

재활의학과 전문의,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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