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 부장 시기와 가정의 양립

과장, 부장이 되면 일과 가정의 양립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회사에서 가장 바쁘게 일하는 시기가 과장, 부장 때다. 가정에서도 이 시기쯤 되면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여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맞벌이 부부들은 육아와 가사노동 분담이 어깨를 짓누른다. 사회교리에서도 이 같은 어려움은 개인이 혼자 해결할 수 없고, 정부와 고용주, 노동조합이 일과 가정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생계 노동의 유연한 모델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부장 때, 영화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을 뒤늦게 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조지 클루니와 미쉘 파이퍼가 주연한 이 영화는, 자신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인연으로 우연히 만난 두 이혼남, 이혼녀가 바쁘게 처리해야만 하는 일과 육아 부담으로 인해 격렬하게 충돌하며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관객들은 두 남녀의 충돌과 거기서 싹트는 사랑에 주목했지만, 나는 반복되는 일과 육아의 충돌에서 과거 자신을 발견하며 그만 눈물짓고 말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몸으로 실천하며 처절하게 실감하게 된다. 사회교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신앙인은 일과 가정의 양립,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가사노동의 부담으로 정신없이 하루를 지내다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살게 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주어진 의무에만 충실하면 어느 순간 ‘번아웃’이 찾아와 크게 방황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성찰이다. 성찰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우리는 지혜로운 안내자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 수사 신부인 안젤름 그륀은 “성찰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온전히 머물게 된다. 조용히 자리에 멈춰서 자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나를 느껴 본다.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둘러싼 주위를 바라본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서 있을 때 비로소 내 시야에 들어오는 주위의 모든 것을 향해 나를 열 수 있다. ....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모든 생각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생각을 잠시 멈춤으로써 진정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자신, 곧 자아와 만날 수 있다. 비로소 우리 삶 전체를 온전히 내면에 충실한 삶으로 채울 수 있다”("인생이라는 등산길에서", 생활성서, 2021)고 말한다. 성찰을 통해 내게 주어지는 의무와 부담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실천하게 된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유지하고 생활하면 이 시기에 다른 고민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과장 4, 5년 차부터 부장 초반까지 일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성장이 정체될까 우려하는 마음으로 이직을 고민했다. 입사 초기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많지 않아 이직보다는 사내 독립기업 형태의 벤처 창업을 선택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하는 업종 대표회사들이 모여서 온라인 비즈니스를 전문으로 하는 합작기업(Joint Venture)을 운영하는 사업모델이었다. 새로 회사를 설립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직접 전국을 돌며 영업을 하는 등, 정신없이 바쁘게 일했다. 온라인 비즈니스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장점은 있지만 중간 유통 단계를 없애는 효과도 있어서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저항을 극복해야만 했다. 2000년대 초반은 투명한 거래도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상태여서 불투명한 거래를 원하는 오프라인 비즈니스 사업자들이 이용하기를 주저한 면도 많았다. 합작기업을 운영하는 주주 회사들의 이해관계도 자주 충돌했다. 주주들이 회사 청산을 결정해서 다시 원래의 회사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5년 동안 많은 경험을 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의 연대, 큰 조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회사 운영의 권한과 책임이 가져다 준 리더십 등, 회사원으로서 필요한 대부분의 능력은 이때 얻게 되었다. 남들보다 경력 5년을 누락해서 팀장,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지만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각자의 역량에 맞게 성장한 회사원이 실천해야 할 사회교리는 무엇일까? 사회교리의 핵심은 인간 존엄성의 원리,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들이다. 또한 근본적인 가치들도 제시한다. “사회의 모든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근본적으로 진리, 자유, 정의, 사랑이다.” 정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정의의 가치를 연대의 가치와 나란히 둔다. 정의는 평화로 가는 우선적인 길이고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사회교리에서는 신앙인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진정한 평화는 항상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시작 된다”고 말한다. 또한 “진실한 사랑으로 주변의 이웃을 향해 다가설 때 우리는 내적인 평화에 이루고”, “자신이 누리는 평화는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 준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추구를 통해 날마다 조금씩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 안에서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신앙인은 노력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냐시오 영성연구소에서 펴낸 책 "인게이지, 평화로 나아가는 비폭력 참여 매뉴얼"에 바탕을 두고 진행한 비폭력평화 워크숍에 참여해서 신앙인의 평화실천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회사를 다닐 때 필요했는데 정작 퇴직해서 쉬고 있을 때였다. 다시 일할 기회가 주어져 이를 회사 안에서 워크숍 형태로 진행하면 구성원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다가 뜻하지 않게 주어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퇴사하게 되어 아쉬움이 무척 컸다. 워크숍 첫째 날, 참가자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 인상적이다.

- 나는 내가 안전하고 편하게 느끼는 정도만큼 나누고 참여하기로 약속합니다.

- 나는 이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 나는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한 참가자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약속합니다.

- 나는 서로의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로 약속합니다.

우리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여러 가지 유형의 폭력을 알아채고, 우리의 습관적 반응들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서로 도와주며 배우고, 비폭력적인 힘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준비하고 각자의 생활에서 이를 실천하고 결과를 나누는 학습그룹을 만드는 일이 워크숍의 주요 내용이다. 회사 안에서 이런 소그룹을 만들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고, 회사 밖에서 서로 다른 조직에 속한 신앙인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 격려하며 배운다면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신자들이 각자 속한 본당(성당)공동체 안에서 찾는다면 좋겠지만, 나의 경험으론 본당공동체보다는 평화 관련 단체에서 찾는 것이 더 쉬울 듯하다.

과장, 부장의 시기는 회사 안에서 리더가 되기 전에 필요한 역량을 갖출 수 있는 소중한 시기다. 이 시기에 잘 준비한 회사원들은 리더가 되어서도 어렵지 않게 구성원과 회사 모두 행복한 조직을 만들어 내지만, 뒤늦게 깨달게 되면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다해도 쉽지 않다.

조은기(아우구스티노)

80년대 가톨릭학생회와 야학에서 20대를 보내고, 33년 동안 대기업, 중견기업, 소기업에서 사원, 대리, 과장, 부장을 거쳐 팀장, 임원, 대표이사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은퇴하여 국내외 다양한 순례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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