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청년 칼럼에서는 요즘 보기 쉽지 않은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청년으로서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교회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회(2, 3월) 맡아 주신 홍예진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단순히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 단체건 요즘 화두는 청년 신자 잡기다. 아예 발을 들여놓지도 않을 뿐더러, 발길을 끊는 청년들도 많다. 그런 가운데 살짝 별종 같아 보일 수 있는, 가톨릭교회와 신앙에 너무나도 진심이 된 내 이야기, 그런 내가 보는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요즘 청년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도 있구나’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 주셨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이 같은 청년들에게는 작은 공감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태신앙에서 냉담까지

나는 성당 커플의 딸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은 태중부터 가톨릭 신자다. 하지만 어릴 때 나에게 성당 이미지란, 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부모님이 끌고 가니까 할 수 없이 가던 곳이었다. 내성적이던 성격 탓에 주일학교 다니는 것도 싫어해 겨우 주일미사에만 참석했었다. 애초에 믿음이 없었고 성당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없었기에 첫영성체 받는 것도 싫어했지만, 부모님과 모종의 거래 후 6학년이 되어서 첫영성체를 받았다. 그 후 나의 본격적인 냉담이 시작되었다.

냉담에서 새로운 깨달음까지

머리가 크면서부터, 나는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책에 빠져 지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다다랐던 결론은, ‘신은 없고, 과학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였다. 따라서, 대학교에 가서도 과학 관련 전공을 하고 싶어 그것에 맞게 중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재수까지 이어졌고, 재수 원서를 쓸 때 정말 뜬금없이 신학교에도 지원하게 되었다. 가족들이 믿기에, 나 또한 세례를 받기는 했기에, 이 종교에 대해 궁금하기는 해서 홧김에 저질렀다.

그렇게 입학하게 되었고, 교육과정상 저학년 때 철학만 주구장창 배우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다. 하지만 3학년부터 본격 신학을 배우면서 조금씩 흥미를 붙여 갔다. 그런데도 나의 신앙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교회도 못마땅한 부분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이 진리인지 와닿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4학년 때, 복수전공 제도가 도입되어 미련이 남아 있던 과학 공부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주저 없이 도전하게 되었다. 다시 과학 공부를 하며 처음에는 굉장히 설렜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원했던 진리의 답을 과학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달았다. 따라서, ‘그렇다면 진리, 영원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나는 내 가장 가까이 답이 있었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바로 하느님만이 그 답이 되실 수 있었다. 이를 깨달은 후, 나의 신앙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사야서 30장 18절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내게 베풀 준비를 하시고, 내가 깨달음으로 응답하는 때만을 기다리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여성신학을 만나다

이제 와 돌아보면, 사실 그전부터 하느님은 나를 조금씩 당신에게 스며들도록 작업하셨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라고 정체화하기 훨씬 전부터, 페미니스트였다. 그렇기에 내가 교회에 가장 큰 거부감을 느꼈던 부분은 교회의 젠더 감수성과 성차별 부분이었다. 특히 한국 교회의 경우 성직주의와 한국 특유의 가부장제가 만나 더욱 그 부분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신의 모상으로 동등하게 창조했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시는데 지상 교회가 돌아가는 것, 성서에 쓰인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학교에 입학한 후 우연히, 여성신학이라는 신학 분야를 알게 되었다. 여성신학이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기존 신학을 재고하는 학문이다. 기존 신학은 남성의 체험과 시선을 기반으로 하기에 여성을 종속하고 억압하는 데 이용되고 남성중심적 교회를 만들었다면, 여성신학은 여성의 체험과 시선을 기반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해방을, 더 나아가 평등을 지향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신학을 접한 후, 신 세계이자 숨구멍을 만난 기분이었다.

나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고 충돌감을 느끼도록 하며, 분노하게 만들었던 부분들에 대해, 이미 나와 똑같이 고민하고 충돌하며 분노했으며, 자신 나름대로 답을 내린 선배 여성신학자들의 사유는 나를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다. 내가 신앙에 진심이 된 후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이 만들어 주었고, 여성에서 더 나아가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세심하게 고려하고 돌보며 연대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신학을 만나고 큰 변화를 겪으며, 더 많은 교회 구성원이 여성신학을 알고 교회가 더 수평적으로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나처럼 여성주의와 가톨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디에도 속하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여성신학은 희망을 제시하고 하느님은 이런 끼인 사람들과 더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또한 과반수가 여성인 신자들과 함께 가는 사목자들에게, 여성신학은 꼭 필요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렇게나 강조하시는 모든 이와 함께 가는 교회로 나아가는데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 여정

현재 교회는 모두가 함께,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걸어가는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 여정 중이다. 이 과정에서는 판단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용기를 가지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성령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을 식별해 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열려 있도록, 특히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늘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청년들도 이를 가장 바라지 않을까 싶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이 진정한 시노달리타스 여정일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는 것. 편견과 차별, 소외됨 없이 친교하고, 참여하며, 각자의 사명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며 격려해 주는 것. 또한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주의 깊게 관심 가져주는 것. 이것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청년들이 반길 교회의 변화 방향이다.

홍예진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연대'인 사람으로, 모든 소외받고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려 노력 중이다.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으며, 어쩌다 보니 신학과 신앙에 진심이 된 20대 가톨릭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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