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은 내게 좀 당황스럽고, 낯선 달이다. 새롭게 쓰는 2024도 어색해, 자꾸 작년의 어느 날이고 싶은 그런 착각에 시달린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세상은 너무 혹독해서, 그리고 여기저기 들리는 마음 아픈 소식들 때문에, 새해에 거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새해 소망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가 아니면, 새해에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든가 하는 세상에서, 새롭게 가지는 소망이라는 말이 무색한 것 같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은 무언가 세상적인 희망이 좌절되는 시간, 하늘나라에 대한 무력한 소망이 극대화되어,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을 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이라 불렀는데, 어쩌면 올 한 해 나의 기도는 메시아적 시간을 살게 하소서가 될 것 같다. 새로 맞이하는 이 한 해에는 '메시아적인 시간'을 사는 마음들이 온 세상에 퍼져 가길, 하늘나라를 새롭게 그리고 신선하게 갈망하는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기로 한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움을 만나는 이 시간 1월이 되면, 나의 여전한 작음만 드러나는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그래서인지, 연중 시기가 시작되면 무언가 마음이 놓인다. 부산한 축제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더욱 초라하고, 외로운 사람은 더욱 서러울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뒤로하고 드디어 연중시기가 시작되었다. 왜 연중시기에는 안도감이 밀려오는 걸까.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좋고, 그저 평범하고 또 다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도 좋다는 신호처럼, 초록색의 긴 연중시기가 너무 반갑다. 그냥 평범한 시간이 내게 얼굴을 내밀고, 익숙하게 거리로 나는 아침 산책을 나서고, 공부도 하며, 수업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만들어 내는 생의 리듬을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1월은 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시작되는 시간이니까 그러하다. 지나간 것을 마음속에 잘 정리하고, 이제 무언가를 툭툭 털고 시작하는 시간이니까 1월은 이른 봄날과 다르지 않다. 아직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린이 영어 미사 강론을 준비하다가, 연중시기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관계를 맺어가는 사건으로 시작됨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생의 깊은 의미를 관통하게 될 이 우정의 사건은, “어디에 머무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성서는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고 전한다. 요즘 우리의 삶은 너무 빨리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머문다는 말에 내 눈길이 간다. 계속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쓰고, 말하는 삶을 멈추고 그 진심 속에 머물 수 있는 내면의 용기에 내 마음이 간다.

새해에는 그렇게 불러 오던 사소함으로 늙어가는 일에 대해, 그리고 그 신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고 기록하고 싶다. ©박정은
새해에는 그렇게 불러 오던 사소함으로 늙어가는 일에 대해, 그리고 그 신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고 기록하고 싶다. ©박정은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깊은 관계에 머무를 수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깊이 만나기 위해, 그 사람의 맘과 삶에 머무를 만큼의 여유와 관대함을 가졌는가. 더불어, 나는 나와 머물고 싶은 사람에게 내 맘의 자리를 내어 줄 환대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요즘 우리들은 개인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 개인 공간을 지켜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타인에게 안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투명해서, 다른 이들이 머물 수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분명 그 공간은 하늘나라일 것이다. 나는 상상해 본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래서 그분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체험한 그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하고. 늘 나의 묵상에 그곳은 아주 작은 곳이고, 또 마당엔 아직 빗질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정갈한 곳이다. 그래서 작지만, 참 넓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와서 보라" 하신 그곳은, 어떤 곳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어디서든지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곳이 그분을 깊이 만나는 곳일 것 같다.

빗속에 우두커니 선 행려자의 모습에서도, 어두워지는 거리의 어둑한 뒤편, 텐트를 친 사람들이 두런 거리는 이야기 소리 속에서도, 여섯 시간 거리를 새벽부터 차로 달려, 그저 점심을 한 끼 함께하곤, 서둘러 돌아가는 아주 오래된 친구의 늙어진 뒷모습에서도, 그리고 미사를 드리며 눈을 맞추며 웃어 주는 어린이들의 예쁜 눈망울에서도, 와서 보라 하시는 예수님, 그분과의 친교 속으로 걸어가는 소소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라면, 1월에 시작하기에 아주 쉽고 또 재미난 일일 것 같다.

주님, 어디에 거하십니까? 그곳이 어느 곳이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계시는 곳으로 흘러가서, 하늘나라를 한 뼘 더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림자가 되어도 좋다. 그렇게 맑은 물이 되어도 좋다.&nbsp;©박정은<br>
주님, 어디에 거하십니까? 그곳이 어느 곳이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계시는 곳으로 흘러가서, 하늘나라를 한 뼘 더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림자가 되어도 좋다. 그렇게 맑은 물이 되어도 좋다. ©박정은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이 머무는 곳으로 떠나갔던 그 제자들이 사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음을 생각해 본다. 요한의 제자들은 “보라, 천주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듣고, 아무런 미련 없이, 새로운 선생님을 따라 나선다. 의리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던 수련자 때의 어느 날, 이 복음을 묵상했었다. 그때 선생 수녀님은 내게 물었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그를 따라갔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너희가 몸담고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스승을 찾아 떠날 수 있느냐고. 나는 그때, 힘들겠지만 떠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요한의 제자로 남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누가 메시아인지를 알았던 분이고, 바른 말을 하시는 분이다. 무엇보다 정들었던 관계를 끝내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마음 아픈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맘속의 메시아를 따라 나서는 일은, 신앙의 본질 아닌가. 그러니 메시아적인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메시아적 시간을 사는 일이고, 내 맘의 메시아를 따라 나서는 일이다.

나의 수도 여정을 돌아보니, 새로운 스승을 찾아 참 많이 떠났었고, 늘 그렇게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알고 싶었다. 그러니 진정성을 가진다는 전제를 놓고, 나에게 있어 머문다는 것은 결국 흘러가는 것이다. 진정성에 대한 나의 애정은, 끝없이 나를 순례자로 남게 한다. 오늘 내가 있는 곳은, 그저 영원이라는 하늘나라의 진실 한 가지를 배우는 학교일 것이다.

그러고 나니, 연중시기라는 일상이, 그리고 1월을 사는 부담이 사라지며, 휘파람 불며 가는 언덕길의 한 길모퉁이와 같이 느껴진다. 늙음과 늙어감을 배우는 일상, 내게 낯선 일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일상이고 싶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다며 좌절하고, 빙하는 오늘도 녹아내린다. 그래서 나는 연중시기의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류가 함께 바치는 기도에 내 기도를 합쳐 볼 요량이다. 매우 작은 일들을 열심히 해 나갈 요량이다. 누구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고, 난 멈추어 서야 하는 시간을 알아차리며, 숨어서, 그렇게 작고 사소한 메시아적인 시간을 살아 볼 요량이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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