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이 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염없이 걷고 싶다. 투명해진 빛 속을 걷는 어느 오후여도 좋겠고, 회색 빛 흐린 하늘 아래 편지를 부치는 그런 아침이어도 좋겠다. 오늘은 우리 회 수녀님들과 함께 모여 기도를 하고 식사를 나누는 맑은 주일이다. 우리 동네 수녀님들이 모였는데, 많은 분이 요양원으로 떠나시고 겨우 스무명쯤 남았다. 또 내년 십일월 즈음이면, 우리는 더 조그만 모임이 되겠지. 걷는 것도 힘들어진 수녀님도 있고, 갑자기 많이 늙어 보이는 수녀님도 있지만, 우리는 함께 점심을 하면서,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단순한 마음, 그리고 일 수녀(그저 한 사람의 수녀)이면 좋은 우리들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색하며 인사하고, 서로 정성껏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나누면서, 묵상 나누기를 하며, 이런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하늘나라일 거란 생각, 더 나아가 그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서 십일월은 감사할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달이다. 하워드 서먼(Howard Thurman)은 감사하는 일에 대해 묵상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수고가 맺은 열매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한다…

어떤 것들은 내가 열심히 찾은 열매로 얻은 것들이지만,

많은 것들은, 소리 없이 내 삶의 여정에 다가와서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내 영혼을 기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놓고 침묵하면서, 일년을 되돌아보았다. 수녀님들의 성찰들은 재미있기도 하고, 참 친절한 것들이었는데, 내 옆에 앉은 리즈 수녀님은 같이 지내는 수녀님 돌보는 일을 함께 해주는 반려견에서 받은 위로를 이야기했고, 베스 수녀님은 이번 여름 한국에 와서 지낸 일을 감사하게 기억한다고 나누어 주었다. 캐롤 수녀님은 매일 아침 자기 집에 찾아오는 까마귀 이야기를 했고, 가자(Gaza) 아이들을 찾아가며 편지를 쓴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 목사님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의 용기와 사랑의 열매가 고맙다고 했다. 

십일월의 어느 오후, 나무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새처럼, 나도 한 해를 찬찬히, 그리고 곰곰이 바라보고 싶다. ©박정은<br>
십일월의 어느 오후, 나무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새처럼, 나도 한 해를 찬찬히, 그리고 곰곰이 바라보고 싶다. ©박정은

나의 한 해도 정신없이 달려, 해 저무는 바닷가에 당도하려 하고 있다. 가장 감사한 일은, 내 주변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또 아가들은 소년 소녀로 매일매일 자라는 일이다. 또 함께 영성 공부를 시작한 자매들의 영혼이 너무 빛나고, 고와서 내 눈이 부신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이 기도의 첫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세상에는, 자기 명예나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한, 아니면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무언가를 끝없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에서 많은 사람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생명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는가. 부모나 형제가 없는 젊은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가 되어 주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수고가 맺은 열매를 함께 자랑해 주고 싶다.

교회력으로 한 달을 마감하는 십일월이 되면, 마지막 날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는데, 요즘 같은 불확실성 시대에 이런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비유나 가르침으로보다는, 실질적인 이야기로 와닿는다. 아마 그래서 내게 오늘 우리 수녀님들과의 수다스런 점심식사가 종말적인 희망의 순간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함께 있음을 감사했고, 각자 준비해 온 많은 디저트를 즐겼다.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서 나와 올해로 90이 된 노엘 수녀님은, 다른 수녀님들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디저트를 먼저 먹었다! 그래서일까, 더 부드러워지는 햇살을 뒤로하고 떠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등불을 들고, 한평생 기다린 예루살렘의 처녀들을 본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식장으로 신랑을 모시고 들어가는 역할을 맡은 신부의 친구들 이야기다. 결혼식장은 늘 재미있고, 설레고, 아름답다. 그리고 내가 신부의 친구였어도, 등불을 들고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차도 없고, 아이폰도 없던 그 옛날엔 신랑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기름을 넉넉히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일찍 온다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혹시 늦어지면, 캄캄한 밤에 낯선 길을 오는 신랑에게 참 반가운 불빛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에는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다.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어린이 강론에 각자 램프에 채울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강조했다.

그레이슨 페리의 '나날의 지도'. 이 화가는 자기 마음을 하나하나 그려 넣으면서 영혼의 지도를 그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2023년 내 영혼의 지도는 어떤 모습일까?&nbsp;©박정은<br>
그레이슨 페리의 '나날의 지도'. 이 화가는 자기 마음을 하나하나 그려 넣으면서 영혼의 지도를 그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2023년 내 영혼의 지도는 어떤 모습일까? ©박정은

그런데, 오늘, 말씀을 나누고, 서로서로 축복과 위로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나는 알아버렸다. 내 기름이 좀 부족해도 괜찮음을. 우리 수녀님들은 분명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이 준비했을 것이고, 우리는 다 같이 웃으면서 그 하늘나라의 풍요함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여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초록별에 누구도 외롭지 않게, 서로서로에게 부족한 등잔에 기름을 채워 주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도 한 해를 마감하면서, 남은 주간 동안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열매에 대해 더 많이 기억하고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내 맘속에 어떤 씁쓸함이 자리하려 할 때면, 내 맘에 더 큰 폭풍이 올 때, 내 존재의 더 깊은 곳을 흔들어, 그런 씁쓸함도 쓸어 버리시라는 믿음을 청하기로 한다. 그러니 십일월의 어느 하루, 어느 한 나절은 가만히 햇살이 덥혀 놓은 따스해진 벽에 몸을 기대어, 내 영혼의 지도를 그려 보기로 한다. 

내 마음 한가운데, 길게 누운 생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도 그려 보고, 

나의 빛과 어둠은 어디에 놓여 있고, 

어느 길목 귀퉁이에 종말적인 희망은 살고 있는지, 

산 자와 죽은 자의 통공은 내 산책로 어느 강가에 있으며, 

내가 하는 공부는 어느 골목길에 있으며, 

사랑으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산책길 어디에 있는지를,

 찬찬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내 마음의 지도를 그려 보는 일로, 십일월의 기도를 대신한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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