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상 기온이 아닌 곳이 별로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도 폭우가 쏟아졌다. 늘 단단한, 그래서 모든 것을 지탱해 줄 것 같은 대지는, 너무 그렇게 근거 없이 믿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듯했고, 가로수가 뽑혀, 주차해 좋은 자동차 위로 무너져 내린 집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다행히 전기가 나가지 않았지만, 여러 동네에서 며칠 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춥게 지내기도 했다.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무들이 좀 해갈을 한 표정일까 살펴보러 나가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무들이, 겨울 가뭄으로 너무 말라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 착하지 않은 세상이 싫어서 다 함께 이 해는 새로운 생명을 틔우지 않겠다고 결탁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사실 이제 생기가 돋은 나무들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본 나무들은, 지나친 물벼락에 생명감이 넘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거리에 잘려 나간 나무들이 스산했다. 봄이 오면, 나무가 싹을 틔우리라는 기대가 당연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생에 대해서, 내 삶에 대해서 무수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면서, 왜 나를 둘러싼 환경과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그렇게 당연히 여기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자연(自然)이라는 말 자체가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당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내가 아파지는 것처럼, 나무도 아플 수 있다. 어떻게 봄이 되었는데, 나무가 움이 안 트느냐고, 봄이 되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나는 더구나 말할 자격이 없다. 

우리 동네의 가로수 플라타너스가 나무 그늘을 만들면, 서늘하고, 신선하고, 아름답다. 새봄이면, 새잎을 틔우게 마련이라는 나의 예측과 달리, 나무들은 건조하게 시들어 간다. 그래서 하루하루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한다. 그동안 만들어 주었던 그 그늘과 그 수고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그리고 내 생에 선물처럼 다가온 모든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박정은<br>
우리 동네의 가로수 플라타너스가 나무 그늘을 만들면, 서늘하고, 신선하고, 아름답다. 새봄이면, 새잎을 틔우게 마련이라는 나의 예측과 달리, 나무들은 건조하게 시들어 간다. 그래서 하루하루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한다. 그동안 만들어 주었던 그 그늘과 그 수고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그리고 내 생에 선물처럼 다가온 모든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박정은

그러면서 요즘 내게 새로 생긴 버릇은 밖에 나가서, 움이 튼 나무가 있는지, 아파 보이는 나무가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지난주 몸이 아픈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느라고 차를 몰아 캘리포니아 시골을 달렸다. 아직 아몬드 꽃은 피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봄이 오지 않은 것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는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 구절처럼, 흐드러지게 핀 아몬드 꽃 그늘을 걷다 보면, 봄이 느껴진다. 친구 수녀님이 하는 피정 집은 맥시칸 농부를 위해 지었는데, 아몬드 나무 숲을 끝도 없이 걷는 맛이 참 좋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아몬드 꽃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로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암시한다. 성서에서도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아몬드 꽃 이야기가 사실 많이 나온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아몬드 꽃처럼 오시는 주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가톨릭 문학가 앙리 보스코의 "반바지 당나귀"에도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가 아주 점잖고 품위 있게 등에 꽃이 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성지주일에 신부님께 가져다 드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히브리어로 아몬드 나무는 샤케드(shaqued)인데, 이 단어는 동사 샤카드(shaqad)에서 왔다. 샤카드에는 ‘경계하다,’ ‘깨어 있다,’ 혹은 ‘유심히 살피다’라는 거의 관상의 정의와 비슷한 뜻이 있다. 그러니 우리 동네 거리의 시들어 말라가는 플라타너스를 만져 보고, 또 귀를 대어 보는 행위는, 오월의 어느 봄날, 혹은 부활의 어느 저녁 싱그러운 신록 그늘을 걸어 보고 싶은 소망인 것이다. 사순절이 곧 시작될 텐데, 아직은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는 아몬드 나무 꽃을 기다리며, 이 사순의 순례를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동안, 당연히 때가 되면, 가로수는 잎을 틔워 내고, 그렇게 신록의 그늘 아래로 산책을 즐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함이다. 세상이 나를 위해 굴러가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시간이 되면, 가로수는 잎을 틔워 주고, 또 때가 되면 꽃은 향기를 내야 한다 등, 내 스스로 당연한 것으로 여긴 많은 것이 그때 주어진 은총이었고, 최소한 우연이었음을 이제야 나이 먹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얼마 전 지인이 부쳐 준 책에 "사슴벌레식 문답"이라는 재미난 소설이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젊은 날의 치기로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문을 많이 했음을 기억했다. 성직자가 어떻게 그래? 교회가 어떻게 그래? 신자가 어떻게 그래? 사슴벌레식 문답은 성직자가 어떻든지 간에 그래. 교회가 어떻든지 간에 그래, 신자가 어떻든지 간에 그래가 될 것이다. 사실 나의 신앙생활도 그런 질문의 연속이 아닌가? 가로수가 어떻게 말라 죽어? 응 어떻게든 말라 죽어. 백오십 년이나 된 대학이 어떻게 문을 닫아? 응 그렇게 문을 닫아. 

그리고 또 이렇게 나에게 묻는다. 너는 수도생활을 그렇게 하고 아직도 그렇게 인간이 편협해? 응 그렇게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편협해. 어쩌면 사슴벌레식의 그 응답이 훨씬 성숙한 삶의 태도일지 모른다. 나의 틀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자연스레 흘러가는 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산책길에 만난 새잎.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새잎이 돋기 위해서는 어느 부분은 잘려 나가고, 정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내 삶이 시들고 있다면, 나도 내 삶의 어느 부분을 잘라 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박정은
산책길에 만난 새잎.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새잎이 돋기 위해서는 어느 부분은 잘려 나가고, 정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내 삶이 시들고 있다면, 나도 내 삶의 어느 부분을 잘라 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박정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표징도 보여 줄 게 없다고 좀 냉정하게 이야기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 그러니까 좀 가볍고, 주의를 기울여 타인의 아픔을 좀 이해하고, 세상의 친절과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 보고, 생의 이러저러한 질곡들을 초연하게(아니면, 허둥지둥이라도) 받아들이며, 그 의미를 좀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그런 삶의 방식을 살아가노라면,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표징-난 표징을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어떤 기호들이라고 생각하는데-들이 있어, 그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몬드 꽃이 아직 피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빈 들판을 달리며, 영영 꽃이 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무섬증이 인다. 시들어가는 우리 동네 플라타너스들과 아직은 입을 꼭 다문 아몬드 나무가 보내는 기호를 나는 제대로 이해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진다.

이번 재의 수요일은 발린타인 데이다. 그리고 많은 이는 고통받고 있다. 외로움으로, 가난으로, 그리고 질병의 고통으로. 그래서 이번에는 초콜릿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내가 만나는 불운한 이웃들에게 조그만 정성을 보내면 어떨까. 그리고 사순 시기 내내, 아몬드 꽃이 피길 기다리는 맘으로, 시들은 채 꼼짝 않는 우리 동네 플라타너스들에게 매일 관심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픈 맘을 붙들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아몬드 꽃을 전해 주러 찾아가는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되어 보길 기도할 것이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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