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를 향한 열린 사회의 잠재적 적들

오늘부터 매달 네 번째 월요일에 '하마터면 지구에서 살 뻔했다!'를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니체의 “지구에 거주하는 인간-비인간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 전환의 주요 관점에 해당하는 문화 현상을 소개하고,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새로운 관계에 대한 문화비평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김연희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1929-2023)가 얼마 전 작고했다. 쿤데라는 체코의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에 숙청되어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 저서가 압수되었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저작들 중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개봉하기도 했다. 원작에서 ‘프라하의 봄’은 제2차 대전 이후 체코의 민주화를 소련 공산군이 진압한 1968년도 사건이다. 한편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서울의 봄'은 한국에서 장기 집권하던 국가 원수의 피격사건이 일어난 1979년 10월 26일부터 시작,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사건이다. 그리고 최근 이를 배경으로 한 동명의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다.

군사 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의 9시간! 영화에서는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 등이 실제 인물들의 이름을 대신하여 근현대사를 재현했다. 반란군과 이에 맞선 진압군 사이, 일촉즉발의 숨막히는 대립에서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분노했다. 태조 이성계도 그랬듯이 쿠데타에서 승자는 영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회 세력이 대통령의 승인 없이 진압군들을 체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영화는 거기까지만 다루었지만 이후 권력을 잡은 1980년 신군부는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229명이라는 최대 민간인 사망·실종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를 남긴 채 ‘서울의 봄’은 잔혹하게 끝이 난다.

영화는 유사한 개혁 의도와 결과를 가진 두 사건을 배경으로 각각 '-의 봄'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원작을 영화로 한 '프라하의 봄'과 '서울의 봄'은 그 의도가 사뭇 다르다. 원작에서 쿤데라는 이념 갈등 속에서 개인적 삶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실존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정치와 사랑’을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키워드로 양분한다. 배경이 되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무거움이고 필연이고 관습에 의한 '키치(kitsch)'라면, 주요 인물들의 사랑은 안정에서 벗어나 생의 가벼움을 발견하는 우연에 기대어 양자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왼쪽부터)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민음사)과 11월에 개봉해 천만 관객을 기록한 '서울의 봄'.(김성수) (이미지 출처 = 민음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왼쪽부터)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민음사)과 11월에 개봉해 천만 관객을 기록한 '서울의 봄'.(김성수) (이미지 출처 = 민음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소설 속 캐릭터들의 삶의 관점은 ‘키치’를 혐오하는 가벼움의 대변인 토마시-사비나, 그리고 ‘키치’적인 관습과 신념을 추구하는 테레자-프란츠로 이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 사이에 서로가 닮아가고 정반대의 관점이 유사하게 되면서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인생은 무거운 미래를 위한 삶과 가벼운 현재의 행복을 위한 삶, 이 두 가지 모순 사이에 시소게임처럼 움직이듯 말이다. 허무하고 깃털같이 가벼운 삶을 추구하는 바람둥이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잦은 우연이 필연으로 기울어 테레자와 함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쿤데라를 유명하게 만든 초기 장편소설 "농담"에서 이미 작가는, 세 줄 농담으로 인생이 꼬이게 된 주인공 루드비크 얀을 통해 인생조차 한 편의 농담이고 복수는 환상적인 자신만의 종교와 신화일 뿐이었다는 웃기고도 슬픈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서 ‘키치’는 무거운 것,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운명적인 영원회귀를 꿈꾼다. 이는 독일어 명제인 에스 무스 자인(es mus sein) 즉, '그래야 한다'는 필연의 의미와 관련한 말인데, 정치적 이념이나 국가주의, 종교적 신념이 대표적인 양상이다. 따라서 ‘키치’는 똥과 같은 저급한 것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그럼에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인 ‘키치’를 추구하는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 고통조차도 그 이유에 대한 서사만 있다면 고통을 택하기도 하는 인류에게 최대 저주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농담"의 루드비크는 복수의 목적을 잃게 되자 좌절한다. 반면, 키치의 왕국을 찢는 니체가 말년에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는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는 일화는 인간 이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을 거부한 면모를 보여 준다. 공산당원이었지만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 쿤데라 역시 그의 많은 소설에서 ‘키치’에 대한 거부를 보여 준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적 정체성, 그것이 전체주의가 될 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키치’는 혐오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적 요소나 스토리 전개 방식은 매우 달랐지만 사건으로 바라본 1968년 체코와 1980년 대한민국, 배타적 민족주의나 교조적 원리주의라는 잠재적 적들은 언제나 긴장에 지친 마음 약한 사람들을 하나의 ‘신념’으로 설득해 왔다. 칼 포퍼의 유명한 말대로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그것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인간에 의해 지옥을 만들 뿐이다.” 그래서 정치라는 키치가 개인적 삶을 소모할 때, 그 환승역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된 공존에 의한 것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메세지는 지금 시대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김연희

홍익대학교 예술학 박사(미술 비평 Art Theory and Criticism ph.D)

미술 평론 및 대학에서 예술 이론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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