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의 여정을 마치고, 몸은 내가 살고 있는 알라미다로 돌아왔지만, 아직 내 맘은 동남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건 꼭 시차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내 영혼은 베트남의 수도자들, 그리고 너무나도 천진하고 아름다웠던 사이공의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기도 하다가, 홍콩에서 만난 대학생들의 고뇌를 기억하기도 하다가, 지난 시간들과 눈 앞에 닥친 해야 할 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길에 대해,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참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내 수업은, 베트남이라는 아직은 가난하고, 그러나 꿈이 피어나는 거룩한 곳으로의 초대로 시작되었다. 베트남 예수신학대학원의 신학과정 예수회 수사님들과 다른 수도회, 특히 이번에는 포항 성심 시녀회의 베트남 수녀님 등 15명의 수도자들이 함께 수업을 들었다. 자기들의 삶 속으로 나를 들어오게 맘을 열어 주는 그들에게 감사하면서, 우리는 함께 21세기 세상을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나누며, 많이 웃었다. 이 수업은 내가 오 년째 해 오고 있는 수업으로 '성 (sexuality)과 영성'이라는 과목인데, 올해는 특히 여학생 수녀님이 있어서 더 풍성했다. 공부를 계속 하면 참 좋을 것 같은 수녀님이라, 졸업을 앞둔 수녀님을 보는 내 맘이 괜히 마음이 짠했다. 어떤 길을 가시는 가장 멋진 길을 가시라고 기도할 수밖에-.

성과 영성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인간적인 수도자가 되기를 함께 소망하면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우정을 확인하면서. (사진 제공 = 박정은)<br>
성과 영성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인간적인 수도자가 되기를 함께 소망하면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우정을 확인하면서. (사진 제공 = 박정은)

올해 수업 중, 가장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눈 부분은 동성애와 젠더에 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감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편견을 깨어 보려는 의지가 엿보여서 마음이 뿌듯했다. 주말에는 작년에 갔던 가난한 동네를 다시 찾아갔으며,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격의 없음에 다시 한번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눈을 빛내며, 베트남 말로 내게 계속 이야기를 걸었는데, 나는 그저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너무 예뻐서이기도 했고, 아이들이 하는 베트남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거기서 열여덟 살 소녀를 보았는데, 미혼모였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커다란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힘없이 웃었다. 한 평가량 되는 그의 집에는 언니 오빠가 놓고 떠난 조카 아이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던 과자를 그녀에게도 주었다. 내 눈엔, 그 엄마도 그저 어린 소녀여서, 과자를 받아 들고 활짝 웃는데, 더욱 마음이 아팠다. 무더운 날이라 콜라와 얼음을 사서 나누어 먹었는데, 얼음 한 덩어리로 그렇게 즐거워지는 이 아이들에게서 하늘나라를 보았다. 그 아이들이 예뻐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걸 주라고 친구남편이 백만 원을 보내 주어서, 예수회 공동체에 건네주었다. 사랑의 기쁨이 그렇게 커 가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이 놀라웠다. 

천국의 아이들과 함께. 가난한 아이들의 단순한 마음은 얼마나 쉽게 지는지.... 콜라 한 병과 한 덩어리 얼음을 나누면서 아이들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그래서 자꾸만 미안해지는 마음.&nbsp;(사진 제공 = 박정은)<br>
천국의 아이들과 함께. 가난한 아이들의 단순한 마음은 얼마나 쉽게 지는지.... 콜라 한 병과 한 덩어리 얼음을 나누면서 아이들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그래서 자꾸만 미안해지는 마음. (사진 제공 = 박정은)

또 사이공에서 즐거웠던 것은 수녀님들의 공동체를 방문한 일이었다. '포항 예수성심 시녀회'를 방문했는데, 예쁘게 살고 있는 젊은 수녀님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더구나 한국 수도 공동체가 베트남의 문화와 만나서 융합된 모습이 새롭고, 또 감동적이었는데, 한국스럽기도 하고, 또 베트남스럽기도한 이 공동체에서 글로벌 시대의 수도생활을 보는 듯했다. 거기서 만나 본 또 다른 공동체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매회'였는데, 수녀님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드리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베트남 수녀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카펜터스의 'top over the world'였는데,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디 가는 지, 수도자들과 노래를 부르면, 꼭 이 노래가 등장했다. 난 노래할 기회가 있으면, 늘 'See Tình'을 틀어 놓고 함께 불렀다. 내가 이 노래가 핫하다고 하니 그들은 누구는 이 노래로 청소년 피정 제목으로 썼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베트남 수도자들은 'See Tình'보다는 카펜터스의 노래들을 더 좋아했다.

수업 중에 여러 문화가 함께 만난 경험을 나누었는데, 성심 전교 수도회 수사님들은 필리핀에서 한국, 베트남, 필리핀 수련자들이 함께 공동 수련 받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서로 다른, 그리고 또 비슷한 아시아의 수도자들이 함께 수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훈련 받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 젊은 수사들의 얼굴을 보면서,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을 전하던 그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주일에는 친한 수사님들과 워터 버스(water bus)를 타고 나가 시내를 구경하고, 대성당 옆에 책방 거리에서 노래를 하는 신자 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늦게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함께 비를 쫄딱 맞기도 하면서, 나는 베트남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익숙하고도 오랜 단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친교와 우정, 이 말마디가 오랫만에 달콤하게 내 맘을 감싸주었다. 여학생 수녀님과 3 구역에 있는 극장에 가서 칸느 상을 수상한 베트남 영화도 시청했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참 다정한 일이고,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서로에게 내어 주는 성실한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날, 우리는 모두 오토바이를 타고 오래된 국수집에 쪼그리고 앉아 즐겁게 국수를 먹었다. 최후의 만찬을 이야기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인 우리는 감사하단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저 많이 웃고, 장난 치고, 내년에 꼭 만나자고 인사할 뿐이다. 그런 아시아의 정서가 나는 좋다. 내게 너무 익숙한 정서라서. 후득후득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내년에 또 만나진다면 정말 반갑겠지만, 누가 아는가, 그런 호사가 주어질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지는 않기로 한다.

중국이기도 하면서, 아직은 아닌, 매우 서구화되었으면서 결국 서양은 아닌, 그래서 홍콩인들은 정체성을 놓고 고민한다. 많은 홍콩인이 이미 홍콩을 떠났고, 또 많은 이방인이 홍콩에 유입되었다. 그래서 적당히 이게 홍콩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곳이어서 사람들은 더 영원의 목소리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박정은<br>
중국이기도 하면서, 아직은 아닌, 매우 서구화되었으면서 결국 서양은 아닌, 그래서 홍콩인들은 정체성을 놓고 고민한다. 많은 홍콩인이 이미 홍콩을 떠났고, 또 많은 이방인이 홍콩에 유입되었다. 그래서 적당히 이게 홍콩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곳이어서 사람들은 더 영원의 목소리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박정은

아직 먹먹한 마음으로 홍콩에 왔다. 내 젊음의 한 장면 같은 영화 '첨밀밀'의 애잔한 오보에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홍콩에서 내가 만난 여성들은 한결같이 현실적이고 씩씩하다. 홍콩에서 마지막 오후, 난 홍콩 뱁티스트 대학에서 특강을 했다. 나의 주제는 토머스 머튼이었는데,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주제가 부각되었다. 홍콩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중국의 한 부분인가, 서구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한 정체성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간단한 답변이었지만, 강당에 모인 학생들의 아픔과 고뇌가 느껴졌다. 그리고 사회정의와 관련하여, '우산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현실 앞에, 혼란과 실망을 체험하고 있는 그들의 아픔에는 자꾸 목이 메어 왔다. 여전히 홍콩에서도 나는 내년에 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직 내가 만난 베트남과 홍콩에서 만난 새로운 그리고 오랜 친구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고통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임을 그들을 통해 또 한번 배운다. 우리나라의 아픔도 또 이렇게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일, 그 일을 열심히 해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아름다웠던 여름의 얼굴들을 기억하며, 조금은 차분하게 가을 속으로 걸어가 볼 일이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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