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WR(미국 수녀장상 연합회) 집회에 참석한 수녀님들이 함께 만든 만다라.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한다는 우분투( Ubuntu) 영성을 표현했다. ⓒ박정은
LCWR(미국 수녀장상 연합회) 집회에 참석한 수녀님들이 함께 만든 만다라.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한다는 우분투( Ubuntu) 영성을 표현했다. ⓒ박정은

나의 여름 일정은 아직도 한 가운데인데, 잠깐 들린 나의 집이 너무 반갑다. 한 달여를 비워 둔 나의 집은 공항을 향해 서둘러 나간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한국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미국에서 있을 일정에 대한 이메일이 날라 올 때, 나는 서서히 짐을 꾸린다. 그리고 공항에서의 고요한 시간을 즐긴다. 아직 한국이면서 한국이 아닌, 제3의 공간에 도착하면, 가장 사람들이 적은 장소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내가 만난 크고 작은 인연들을 돌아본다. 우리는 무작정 내가 맺는 관계가 영원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러니 아직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감사할 일이다. 오래오래 두고 만나는 친구가 있다면 더욱 감사할 일이고,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을 사람이 된 지인에게는 조용히 축복의 기도를 올릴 일이다. 그렇게 일보다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정리하며 드리는 화살기도는, 심연에서 올리는 깊은 기도는 아니더라도, 흘려보내기 쉬운, 그렇게 빨리빨리 흘러가 버리는 시간 안에서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 보는 일이라 의미 있다.

오늘 혼자 동네를 천천히 산책하는데, 한동안 잊었던 우리 동네의 냄새가 나를 반겨준다. 약간의 바다 내음과 더운 낮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저녁이라 나뭇잎에서 나는 축축한 향기가 섞인 이 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내가 다시 미국에 와 있음을 확인한다. 나뭇잎들은 한 달 사이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보면서 걷는데, 아주 조그만 고양이가 나를 빤히 본다. 그러면서, 초록초록한 서울의 여름이 그리워서 마음이 서늘하다. 사는 일에 대해, 신앙인으로 사는 일에 대해 소소하게 나눌 수 있었던, 이번 여름 더운 열기를 담은 기억의 알갱이가 하나하나 톡톡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럴 때는 동네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또 동네 성당에 간다.

이럴 때 드리는 미사는 촌스런 강론일수록 좋다. 내가 촌스런 강론이라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 입각한 전혀 멋 부리지 않은 물 같은 강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강론이 좋은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 보면, 미사에서, 신자인 나는 사실, 사제가 신자들을 바라보는 눈길이나 인사하는 자세 그리고 신자들의 반응을 관찰하며, 본당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공부를 많이 한 신부님의 강론보다는 신자들이 좋아하는 신부님의 강론이 나는 좋다. 그런 강론은 마치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목자의 소리 같다. 그런 신뢰 속에서, 우리는 사제가 봉헌한 빵이 그리스도가 됨을 경험한다. 그런 동네의 성당이 참 좋다.

이번 주에 신학을 하는 수도자로서 가장 기쁜 경험을 했다. 미국 수녀장상 연합회(Leadership Conference of Women Religious)가 주최한 모임에서 신학적 성찰을 나눈 것인데, 내 신학이 시작된 자리인 수도자들 사이에서 나눈 성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신학자가 되고 싶은 꿈을 꾸었던 것도 아니고, 교수가 될 희망을 품었던 것 도 아니다. 수도자로서 알고 싶었고, 토끼 굴로 내려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가 가진 거룩한 호기심 (holy curiosity)를 따라 달려온 셈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을 놓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내 수도 여정의 어떤 커다란 정거장 같은 곳에서 나의 생각을 나누는 일, 그리고 그 일이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듣는 자의 커다란 마음 때문에 함께 나누어 짐을 경험할 때, 내가 해 온 공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건 우분투 영성(Ubuntu)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나는 너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도 결국 우분투이다. 나는 우리이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라라 성녀의 축일에,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불순명을 선택했던 그리고 사랑과 겸손으로 자매를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도자의 삶을 사셨던 성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성녀의 꿈이었던 사도직의 삶을 위해 또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다. 두려움 없이. ⓒ박정은
글라라 성녀의 축일에,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불순명을 선택했던 그리고 사랑과 겸손으로 자매를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도자의 삶을 사셨던 성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성녀의 꿈이었던 사도직의 삶을 위해 또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다. 두려움 없이. ⓒ박정은

그렇게 내게 축복 같은 첫 강의가 끝나고 둘째 강의를 해야 하는 그날은 바로 글라라 성녀의 축일이었다. 성녀 글라라는 수도 공동체도 없이 공부하며 두렵고 작아지던 나에게 다가오셨던 성녀다. 글라라 성녀가 있어서 난 든든했는데, 그 성녀는 내 길을 비추어 주었고,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가는 내게 그늘이 되어 주셨다. 가난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교회의 명을 불순종한, 그렇게 내게 진정한 순명, 즉 존재를 다 해서 하늘의 음성을 듣는 자의 용기를 보여주셨던 성녀였다. 그런데 당신의 축일에 또 나를 부르셨다. 갑자기 내가 가르치던 학교가 사라진 후 내일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불안이 안개가 걷히듯이 사라졌다. 글라라 성녀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삶과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였음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용감한 여성들이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이신 교회를 나는 사랑하고 흠모한다. 그리고 젊은 글라라 성녀의 꿈—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싶어 하셨던—이었던 활동의 삶(via apostolica)을 기억했다. 이 새벽, 또 나를 다독여 주시는 글라라 성녀를 경험한다. 나는 누구도 내 발을 잡지 않으니, 어느 곳이든 대신 가드리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난 다시 베트남으로 가는 짐을 꾸린다. 젊을 때처럼 그냥 맨몸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궁리해서 가져갈 것을 챙겨야 한다. 나이를 많이 먹은 나는 영양제도 챙겨야 하고, 소화제도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도 또 길 위에서 나는 설렌다.

하느님은 호렙산에서 의기소침해진 엘리야를 부르셨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가운데서도, 그리고 지진과 거센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으셨다고 성서는 이야기한다. 하느님은 아마도 무언가 거대하고, 압도적인 가운데 계시지 않고,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다정하고 고요하게 의기소침하고 지친 우리를 살짝 부르신다. 두려워 말고, 그저 너의 그릇만큼의 일을 하라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라고. 그것이 물 위면 어떻고, 또 파도 아래인들 어떠랴.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을, 최선을 다해 해가면 되는 것이다. 작은 자들의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 많다. 내가 베트남에서 할 일은 여전히 나의 작은 생각들을 젊은이들과 나누는 일이며, 그들의 생각이 자라는 것을 기뻐하는 일이며, 그들의 복음적 열정을 격려하는 일이다.

생태 위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고통이 들린다. 하와이의 화재 소식도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더워진 날씨에 나의 건강도 걱정되지만, 여행이란, 여행자가 되는 일이란, 언제나 조금은 모험이니 오늘도 또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서며, 새롭게 배우게 될 하늘나라 생각에 마음이 부푼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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