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글은 <가톨릭평론> 39호(2023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다소 힘겨운 마음으로 ‘소희’ 앞에 마주 섰다

결국 피할 수 없었다.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 2022년작)는 개봉일부터 SNS 친구들을 통해 간간이 전해 듣던 영화였다.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과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했던 허태준 작가("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호밀밭, 2020 저자)도 영화를 추천했고, 우리 사회를 향해 색다른 시선을 소개하는 작은 책방지기들도 저마다의 평을 남긴 터였다. 일상에 지친 탓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고 싶었던 탓인지 나는 영화 '다음 소희'에 관한 논의를 애써 피해 왔다.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마음을 쏟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편집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이 영화를 꼭 교회 공동체 형제자매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그렇게 결국 나도 소희 앞에 마주 서고야 말았다.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을 품고 있다.이는 특성화고를 재학 중이던 고 홍수현 씨가 지역 통신사에서 콜센터 상담원으로 실습하던 중 일어난 비극이다. 폭압적인 근무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저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건. 현장실습을 시작한 지 124일 만에 한 고등학생의 꿈과 생명과 세계가 끊어졌던 그날의 이야기를 '다음 소희'는 속죄하듯 뒤쫓고 있다. 영화는 두 인물이 이끌어 간다. 춤을 사랑하고, 멋진 정장과 구두에 기뻐하고, 나의 어른됨에 설레는 아이. 부당함을 참지 못할 정도로 들끓는 피를 지녔던 ‘소희’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불편함을 끈질기게 품는 형사 ‘유진’이다.

담임 선생은 소희에게 좋은 조건과 대기업이라는 배경을 늘어놓는다. 소희는 상기된 표정으로 현장실습 서약서에 서명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책임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소희는 학교에서 콜센터 업무에 대해 배우지 못했지만, 담임은 그저 ‘버텨야 한다’는 지시만 남긴다. 교육자가 염려하는 건 학생의 안전이 아닌 제 지위의 안전뿐이었다.

담임의 호언장담과 달리 소희의 일터는 대기업의 이름을 빌린 하청 업체였고, 그마저도 고객의 날 선 요청을 정면으로 맞아야 하는 ‘해지 방어팀’이었다. 콜센터 업무는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로 나뉜다. 쉽게 말해 고객이 걸어 오는 전화를 받는 팀이 인바운드,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업 활동을 하는 곳이 아웃바운드다. 대체로 인바운드의 업무가 수월하고 실적을 쌓기 쉬운 편이지만, 소희가 배치된 해지방어팀은 사정이 달랐다. 그곳은 의도적으로 고객의 응대 전화를 여러 번 돌려가며 제풀에 지쳐 포기하길 유도한다. 고객은 화가 나고, 현장에 갓 접속한 소희는 당황한다. 이 모든 비극 속에서 시스템을 설계한 이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피해자와 피해자만이 남아 서로를 공격할 뿐이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해지마저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 아래서 고객과 상담원 모두 피해자였다.

소희는 경험을 쌓기 위해 투입된 실습생이었지만, 인바운드팀 안에서도 가장 높은 업무 강도를 자랑하는 ‘해지방어팀’으로 배치되었다. 왜 사회경험이 부족한,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현장실습생을 이곳에 배치했을까. 아마도 부당함을 말하기 어려운 청소년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학교의 탓으로 돌리기 쉬운 현장실습생이기 때문에, 취업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학생을 압박하는 교사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을 ‘실습’이란 단어로 투입했고, ‘사회’에 진출했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일터는 ‘실습생’이란 이유로 인센티브와 기본급을 제한하면서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회사 스크립트에 없는 ‘힘들다’와 ‘그만두고 싶다’를 말하기 위해 소희는 몇 번이고 숨을 삼키고 또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브랜딩을 우선했던 보호자는 아이의 고백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음 소희', 정주리, 2023. (포스터 제공 =&nbsp;트윈플러스파트너스㈜)
'다음 소희', 정주리, 2023. (포스터 제공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인간적 연결이 부재한 험악한 감정노동의 현장

한번 콜을 받을 때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말하는 소희를 누구는 희롱하고, 모욕하고, 무시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어 보지만, 소희의 상황에 공감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스크립트에 따라 행동할 뿐 인간적 연결은 없었다. 일터에서 버티지 못한 아이들에게 학교는 ‘빨간 명찰’을 던진다. 학교의 취업률과 지원금을 갉아먹는 이들이라는 낙인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소희에게 남은 선택지는 어쩌면 유일했다. 어느 곳에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과연 이 당찬 고등학생의 선택지를 없앤 이들은 누구일까. 

열악한 근무 환경과 실적 압박에 죄책감을 느낀 전 팀장은 모든 상황에 대한 내부 고발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기업은 성인의 결단마저 유가족에 대한 보상금과 계약으로 무마하고 만다. 단순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려던 형사 유진은 이제 소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부모님과 회사, 친구들, 학교를 찾아가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과 소희를 간직한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제 유진의 세계에서 소희는 단순한 고등학생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현장실습에 내몰린 청소년의 ‘열악한 노동환경’ 전체로 확장된다.

“우리는 모두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영화 소개에 담긴 문장이다. 영화를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콘텐츠를 보고 슬퍼하기엔 당장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참혹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의 고통은 연출된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다. 스물아홉부터 서른네 살까지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한 박주운 씨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콜센터 상담원 주운 씨"(애플북스, 2020)를 펴냈다. 그 책에서 주운 씨는 “콜센터에 입사한 이후 줄곧 나의 목표는 퇴사였다”고 고백한다. 이곳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온 곳이니까, 나는 여기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으니까 상담센터에 있는 노동자 모두 얼른 이곳을 떠나 버리는 게 목표였다고 말한다.

5년 근무에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모욕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상처였다. 무엇보다 주운 씨는 서른이 넘은 성인이었지만, 화장실에 갈 때마다 허락을 구해야 했다. 변기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잠 시 호흡을 다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리자의 언성은 높아졌다. 나중에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마저 줄이기 위해 물과 밥을 참아야 했다. 박주운 씨 역시 내부적으로 불만을 제기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콜센터 상담원은 당장 내일이라도 교체될 수 있는, 5년 근속 사원이나 이제 일을 배우는 1달 된 신입사원이나 똑같이 고객의 욕설을 듣고야 마는 회사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매년 최저시급이 올랐지만, 하청업체들은 인상된 기본급만큼 수당을 깎았다. 덕분에 콜센터 상담원들의 월급은 매년 그대로였다. 끊임없이 고객의 폭언과 조롱 그리고 실적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는 노동현장에서 상담원들은 점점 회사가 아닌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날 받아 주는 곳은 여기뿐일 것이라는 절망에 다들 스스로를 콜센터 안으로 옭아맸다고 그는 고백한다.

'다음 소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nbsp;트윈플러스파트너스㈜)
'다음 소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비극 현장에서 책임지는 자는 없고, 또 다른 ‘소희’만 기다린다

영화 속 소희에겐 칠흑 같은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유진이 있지만, 비극의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의와 진실에 한 걸음 더 걸어가려는 유진의 눈빛은 춤을 좋아하던 영화 초반부 소희의 눈빛과 닮아 있 다. 만약 소희에게도 현장실습 그다음 생이 있었다면, 분명 유진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영화 속 유진의 눈빛은 어두워진다. “그래서 이젠 교육부까지 가실 겁니까”라는 물 음에 유진의 말문은 막히고 만다. 유진도 알지 못했다. 이 부당함의 끝이 어떻게 풀려야 할지, 이 문제의 책임이 정확히 누구에게 있는지 규정해 내지 못한다. 그렇게 소희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도 점차 미소를 잃어 가고 두 눈의 빛은 탁해진다.

‘학교가 내보내고, 일터가 이용한 산재’라는 점을 ‘미숙한 아이의 충동만 탓하는 어른의 비겁함’이 문제를 감추고 있음을 밝혀내지만, 유진도 결국 지치고 만다. 유진이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함께 석 연치 않아 하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앉은 많은 사람이 유진의 표정을 살피고, 그의 지친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도 현실에서 진실과 정의를 좇는 사람의 뒤는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 속 소희의 고통과 유진의 의지를 외면했다. 기이한 콜센터 노동 현장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분업화 때문에 만들어졌다. 책임과 비용은 줄이고, 생산성은 높일 수 있는 분업과 위계 로 하청 방식이 끔찍한 현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은 우리도 즐겨 사용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진실을 밝혀 주기를, 영웅적인 누군가 등장해 시원하게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정의를 향해 걸어갈 한 사람을 기대한다. 마치 용역 맡기듯 우직하게 걸어갈 현실 세계의 유진을 찾아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사이다 같은 정의 구현으로 끝나지 않는 '다음 소희'의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다음 소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nbsp;트윈플러스파트너스㈜)<br>
'다음 소희'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1인분 책임, 가장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정의

문제를 쉽게 정의하는 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구조와 제도의 문제라는 무딘 문제 제기로는 '다음 소희'가 끊어 내고 싶은 노동 현장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는 어렵게 풀어야 한다. 어렵 게 풀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의 의견이 뒤섞이고, 모두가 나의 문제처럼 달라붙어 내 몫의 안전과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경험과 연륜을 쌓은 이들, 지식과 네트워크로 무장한 전문가에게 분업하듯 맡기는 것이 아닌 모두가 1인분 책임을 지고 하나씩 함께 해결해 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유진처럼 석연치 않은 시선과 태도로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정의를 되찾아야 한다.

내겐 소중한 동료들이 여럿 있다. 가장 어려울 때 곁에서 안정을 주었고, 가장 기쁠 때 마음껏 환희를 나누었던 동료들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가장 꺼내고 싶은 이의 이름은 소희다.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 소담한 이름에 담긴 뜻은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 내내 마음에 남았다. 이름에 사용하는 ‘소’에는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바란다는 뜻은 이름을 닫는 ‘희’라는 단어로 이었다. 소희라는 동료의 이름에는 언제나 ‘새로움을 바라고, 기쁨을 바라고, 변화를 바라는 아이’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제법 이름과 성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어색하고 친근했다. 소희라는 이름에 담긴 슬픈 사연이 어색했고, 소희라는 인물이 지닌 단단한 표정이 친숙했다. 영화 속 소희는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자며 두 눈을 반짝이던 나의 동료, 그녀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다음 소희'는 청소년 노동 현장을 고백했다. 모든 노동 문제가 그렇듯 상황은 당사자의 눈물을 통해 드러나고,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를 통해 감춰진다. 그들은 말한다. ‘네가 문제라고’, ‘이걸 더 크게 만드는 게 문제라고.’ 청소년 노동 현장에선 언제나 문제를 고백하는 사람이 문제가 되어 왔다.

그렇다. '다음 소희'는 별다른 것 없이 잔인한 우리의 오늘을 담고 있다. 다시 월요일이 되면 주말 동안 불편을 겪은 고객들은 콜센터로 전화를 걸 것이고, 콜센터 노동자는 온몸으로 날 선 감정을 방어해야 한다. 영화 속 소희가 바라는 오늘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소희를 막기 위해, 소희의 다음 꿈을 지켜내기 위해 아름답게 연출된 영화의 고민은 이제 우리의 삶에서 치열하고 생생하게 상영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선 우리가 어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우동준

동료들과 함께 사회교리를 공부하는 모임 ‘사교뭉치’에서 활동해 왔고,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내 얼굴에 아버지가 있다"가 있으며, 현재 예비사회적 기업 주식회사 ‘일종의격려’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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