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 제작한 독일 예술영화 한 편이 뒤늦게 개봉했다. 영화관은 불황이어서 기술적으로 풍성하게 볼거리가 많은 영화가 아니면 흥행이 어려운 지금, 조용히 개봉하여 조용히 묻혀 버리는 좋은 예술영화들이 많이 있다. ‘나의 연인에게’도 그와 같은 처지의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결코 작지 않다. 청춘의 사랑과 질곡을 다룰 것같은 제목이지만, 영화는 사랑 이면에 놓인 거대한 신념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제는 ‘부조정사, 세상은 달라질 거야’이다. 파일럿을 꿈꾸는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부조정사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랑을 고백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자신의 신념과 운명을 함께 짊어지어 달라는 또 다른 요구이기도 하다. 그걸 여자는 알 리가 없다.

독일이 배경으로, 두 유학생은 파티에서 사랑에 빠진다. 튀르키예에서 온 의대생 아슬리와 레바논에서 온 치의대생 사이드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첫눈에 서로에게 매혹된다. 아슬리의 집안은 보수적이고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사이드는 자유분방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의학 공부에 진심이며 머리도 좋은 아슬리와 달리 사이드는 부모가 바라는 의사보다는 파일럿이 되고 싶어 몰래 공부하는 중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같지만 유럽과 아랍은 각기 멀어 보이고, 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아슬리를 소개하는 사이드와 달리 아슬리는 엄마에게 그와 헤어졌다고 말한다.

'나의 연인에게'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nbsp;(주)까멜리아이엔티)<br>
'나의 연인에게'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주)까멜리아이엔티)

영화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1996년에서 5년이 경과한 2001년까지를 한 해씩 다룬다. 서로에게 매혹되어 사랑을 나누고, 결혼에 대한 다른 생각 때문에 싸우고, 서로를 잊을 수 없어 결혼하고, 그러다가 떨어지게 되고, 사라지고, 다시 만나고.... 이런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사정이 변하면서 둘의 사랑은 위태로움과 절실함을 오간다.

영화는 오롯이 여주인공 아슬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주로 아슬리의 얼굴을 프레임에 담은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랑으로 인한 충만함과 불안함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바다는 그녀의 감정이 변하는 것을 보여 주는 훌륭한 메타포다. 바닷속을 헤엄치며 사랑하는 육체의 부드러움과 충만함을 느끼는가 하면, 차가운 바다에 홀로 들어가서 세상이 주는 압박감과 고통을 체험한다.

독일과 레바논과 미국을 이동하며 아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마주하게 된다.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에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이드는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어느날 영문을 알리지 않은 채 자신의 비밀을 아내가 지켜 주길 원하며 떠난다. 사이드를 위해 아슬리는 레바논 시부모의 집요한 심문에도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과 비밀스러움 때문에 불안감이 나날이 커지지만 아슬리는 사랑의 추억 때문에 그와 헤어질 수 없다.

'나의 연인에게'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nbsp;(주)까멜리아이엔티)
'나의 연인에게'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주)까멜리아이엔티)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주는 충격은 매우 크다. 아슬리에게 사랑은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이지만, 그녀가 지켜 온 사랑은 의도치 않게 어마어마한 역사적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2001년 세상을 충격으로 떠들썩하게 했던 그들도 사랑하며 살아 왔던 한 젊은이였다.

영화가 끝나면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머리가 멍해졌다. “세상은 달라질 거야”라는 신념으로 영원한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던 사이드의 결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지금 세상에서 아슬리가 가질 사랑의 추억이 걱정스럽다. 아랍권에도 큰 충격이었을 이 사건에서 잊혀진 또 다른 피해자를 소환하는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의 영민함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사랑으로 빛나고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진 아슬리의 마지막 무표정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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