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재즈 연주자가 되길 꿈꾸는 청춘을 그린 ‘위플래쉬’(2014)로 깜짝 흥행을 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당시 29세 젊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고전 뮤지컬의 현대적 부활을 알린 ‘라라랜드’(2016)로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이라는 기록을 썼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데이미언 셔젤은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을 그린 우주 영화 ‘퍼스트 맨’(2018)으로 흥행에서 약간 주춤했지만 여전히 평단과 대중이 사랑하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로 교체되는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하자, 80년대생 젊은 감독임에도 여전히 필름을 고수하고, 고전 영화적 무드를 만들 줄 아는 그가 또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킬 것으로 대중의 기대를 모았다. 유서 깊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픽쳐스는 제작비 8000만 달러를 투자했고,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토비 맥과이어 등 스타들이 캐스팅되었고, 오스카가 환영할만한 소재와 주제로 영화의 성공은 당연시 여겨졌다.

'바빌론', 데이미언 셔젤, 2023. (포스터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바빌론', 데이미언 셔젤, 2023. (포스터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아바타2’와 같은 날 개봉하였고, 두 작품이 똑같이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는 약점을 가졌음에도, 화제성은 ‘아바타2’가 다 가져가 버렸다. 미국 내 비평가들의 평가는 호불호로 갈리었으며,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 어른들만을 위한 이야기인 ‘바빌론’은 흥행 실패와 함께 오스카에 한 부문도 후보에 오르지 못하며 화제에서 멀어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월 1일 국내에 개봉하기에 앞서 선보인 언론시사에서 ‘바빌론’은 미국과 달리 한국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필자 또한 들리던 소문과 달리 이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오를 것 같은 예감으로 세 시간이 황홀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시네마천국’에서처럼 모든 영화들에 보내는 한 편의 연서처럼 느껴졌다.

‘헤어질 결심’이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 오르지 못한 이변으로 잔뜩 속상해 있다가, 지난 몇 년간 오스카가 사랑하고 키워 온 데이미언 셔젤 역시 홀대받는 것을 보며 동병상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바빌른’은 ‘영화에 대한 영화’, 할리우드를 다룬 영화, 인생의 롤로코스터를 다룬 영화들 중 최고작 수준에 든다.

데이미언 셔젤은 히어로 영화나 프랜차이즈 영화가 아니고 고전적인 의미의 드라마성이 있는 퀄리티 시네마를 블록버스터로 찍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그 몇 안 되는 감독 리스트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데이비트 핀처 정도가 들어갈 것이다.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br>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배경은 광란의 시대였던 1926년에서 대공황 시기로 진입한 1932년까지로, 영화사적으로 보면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던 때였다. 할리우드는 성경에 나오는 황홀하면서도 타락한 고대 도시 바빌론처럼 한 낮의 촬영과 한 밤의 파티가 매일매일 펼쳐지는 공간이었으며 활기와 동시에 죄악도 넘쳐났다. 이런 시공간  배경 위에 주인공 세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기력과 그만의 스타일로 오랫동안 할리우드 스타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스타가 되기 위해 악바리처럼 야망을 쫓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촬영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영화감독이라는 큰 꿈을 꾸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가 그들이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교체됨에 따라 잭은 정점에서 하강하고, 매니는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며, 넬리는 벼락 상승과 수직 하락을 왔다갔다 한다. 그들의 직업적 향배는 거대한 할리우드의 지각변동과 맞물리며 역사 속 개인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로맨스는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을 풍자하기 위한 요소로 중요하게 쓰인다.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br>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에는 유성 영화 탄생기를 배경으로 할리우의 행복함을 전파했던 고전 걸작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1952)를 여러 번 적절하게 오마주 하거나 패러디 하는 에피소드들이 풍성하다. 현재 스타들이 연기하는 100년 전 스타들은 무성 영화기의 위대한 스타였다가 추락한 존 길버트, 섹스 어필과 이웃집 소녀 이미지를 오간 할리우드 잇걸 클라라 보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예술과 상업성 사이에서 할리우드 표준을 만들며 프로듀서의 역할을 정의했던 전설적인 제작자 어빙 탈버그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 무성 영화 전성기와 초기 유성 영화 시대를 잘 아는 관객에게는 더 없는 교과서 같은 영화이다. 로맨스이며, 직업에 대한 이야기이고, 영화에 대한 메타 영화인 ‘바빌론’은 사랑, 직업, 영화, 이 세 가지 대상을 한없이 추악하고 싸구려로 보는 동시에 애정과 존경의 시선으로 칭송한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이면은 치열하고 고독한 영화라는 직업, 그리고 스타, 선정적이고 요란해도 예술 정신이 서려 있는 영화들이 있다. 20세기 초 신생 미디어로 등장한 영화와 영화관의 시대는 저물고 21세기 판데믹 이후 올드 미디어로서 영화를 재정의할 때가 왔지만, 고전 영화를 계속해서 찾는 신세대 관객들은 옛 영화와 스타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전환의 시대에 미래를 본 자만이 살아남지만, 영화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에 오래된 것이 절대 가볍지 않음을, 향수 어린 감상에 젖으며 위안을 얻었다.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br>
'바빌론'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Pea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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