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곧 대학교 교수로서 정년을 앞두고 있는 나의 지인이 며칠 전 학회의 요청으로 자신의 연구생활을 회고하는 장문의 글을 적어 나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는 3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나는 그의 회고의 글에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파머 파커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의 “나는 나를 가르친다”(I teach Who I am)를 인용하며 연구 활동이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이었고, 강의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사실 나도 사제직을 수행하는 수도자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제직이란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길을 걷고 있기에 그의 이 표현은 나에게도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지식공장으로 변질된 대학의 현실과 그곳에서 양산되는 지식기능인의 현실을 아쉬워하였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나의 인생의 길을 잘 안내해 준 좋은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는 내 나이 오십 중반에 중년기 남성에 관한 공부를 하려고 호주 멜번으로 떠났다. 공부를 시작하기 일 년 전, 나는 20년 전 나를 지도해 주었던 수녀님을 만나서 최근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그 고민을 신학적으로 성찰해 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연구 논문 제안서를 작성해서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그의 지도로 석사 과정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남성에 관하여 전문가는 아니었고, 또 한국적인 상황을 자세히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늘 나에게 내가 그를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선생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학생을 지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이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강한 신뢰를 느꼈다.

호주의 학위과정은 입학허가를 받은 학생에게 6개월 내에 5000자(석사과정) 또는 1만 자(박사과정) 규모의 에세이를 제출하고 논문 자격 심사를 받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고 몇 가지를 수정해서 6개월 후 재심사를 받아야 했다. 지도교수는 내가 그런 상황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나를 많이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6개월 후 재심사를 통과해 논문을 쓸 자격을 획득했다. 그날 지도교수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친구들과 파티를 하라며 작은 봉투에 100불을 넣어 나에게 주었다. 이 상황은 세상 어느 학생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경험일 것 같다. 나는 그의 생일에 선물을 하곤 했는데 약 20불짜리 와인 또는 초콜릿을 드렸다. 나조차도 그에게 100불짜리 선물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가 나에게 큰 선물을 해 준 것이다. 교수 학생 사이가 지나치게 권력관계의 차원이 강조되는 한국 문화에서 학생이 교수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이 100불을 가지고 같은 지도교수에게 박사과정을 지도 받는 동료 신부와 함께 한인 식당에 가서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이미지 출처 =&nbsp;Cathopic)
(이미지 출처 = Cathopic)

나는 이 지도교수의 지도로 논문을 제출하고 최종적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이 학위 취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연구과정을 통해서 나를 더 깊이 알고 우리 사회를 더 깊이 보게 된 것이다. 특별히 나는 감성지성(emotional intelligence)의 중요성, 즉 자신의 감정 또는 느낌을 인식하는 것, 긍정적인 감정을 실천적으로 내면화시키는 것, 그리고 타인과의 연대를 위해서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음으로써 가능하지 않고 나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대학이라는 시설을 단순히 스펙을 확보하는 지식 기능인을 양성하는 지식공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만을 취득하는 사람은 마음이 성장하지 않아 타인의 절박한 처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심한 경우 타인의 처지를 인식하고 공감해야 하는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들에게 자신이 확보한 지적 능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리고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더 불행한 것은 이렇게 지적 능력만을 가진 사람이 한 집단이나 사회의 지도자로 군림하는 경우다. 그러나 우리는 지적 능력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지적 능력을 우리의 신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물론 이 지적 능력은 누군가를 이끌 강력한 근육을 가지고 있지만 인격이 없다. 그래서 지적 능력이 우리를 이끌 수 없고, 우리에게 봉사만 할 수 있다.” 이는 본인이 지적으로 매우 탁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적 능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다루지 말라고 경고하는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나의 삶의 경험에서도 지식의 부족함은 수치심을 내면화하게 했다. 당연히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문화이니 꼴등에 가까운 사람들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인식한다. 실패자들은 타인들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자존감이 높지도 않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삶의 주체로 새롭게 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지적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배움의 정도와 무관하게 소중한 존재다. 이 깨달음과 신뢰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살 수 있다. 인생은 지적 능력을 끊임없이 소유하느냐 소유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기 위해 서로를 나눌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신비다.

김정대

예수회 사제. 1990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주로 노동 문제와 사회정의 문제를 다루는 활동을 했고, 2004-11년 노동자를 위한 술집, ‘삶이 보이는 창’을 운영했으며, 요즘은 남성들에게 감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활동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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