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힘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울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덮어두었던 마음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터져 나오던 날이 있었습니다. 장기간 지속될 치료를 위해 소임지에서 퇴사하고, 수녀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와 기도까지 마치고 방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하느님을 부르며 울었던 날이 기억납니다.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일했던 만큼, 저의 꿈까지 앗아가신 듯한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는 멍~하게 며칠을 지냈던 것 같습니다. 어두운 방, 어두운 마음으로 지내는 저에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을 부르던 내 목소리만큼이나 간절하게, 내 울음소리만큼이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혼자 있던 방에서 나왔습니다.

“수녀님, 우리 단풍 보러 가자!” 항암치료를 받고 힘들어서 누워 있는데 제 속도 모르고 소풍을 가자는 친구 수녀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힘도 없고 속도 불편해서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절해도 친구 수녀님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제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수녀님이 좋아하던 순댓국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치킨은 어때요? 힘들어도 그냥 나가보자!” 못 이기는 척 얼굴 찌푸리며 따라나섰습니다. 가을 길을 걷다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붉은 단풍도, 푸른 하늘도 화면에 담습니다. 치료받느라 누렇게 뜬 얼굴이지만 셀카도 찍어 봅니다. 제 방을 두드려 주던,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주던 수녀님들의 목소리가 “지선아, 이리 나와”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로 다시 제 마음에 울려 왔습니다.

제가 항암치료를 받던 즈음 김진숙 지도위원이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부산부터 청와대까지 ‘희망 뚜벅이’를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앓는 것도 사치’라며 자신의 해고와 복직 문제를 넘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고용 안정 없는 한진중공업 매각 반대'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걷는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정의에 대한 깊은 갈망이 그분을 병실 밖으로 나오게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채를 들고 환하게 웃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사진이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다시 한번 저를 부릅니다.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희망 뚜벅이에 동참한 분들 역시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어서, 울고만 있을 수 없어서 추운 겨울을 함께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올해 2월 초까지,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투쟁에 희망 뚜벅이들이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걸어가고 있다. ⓒ장영식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올해 2월 초까지,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투쟁에 희망 뚜벅이들이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걸어가고 있다. ⓒ장영식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도 벌써 나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요한 11,32)라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다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달려간 예수님,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며 애달프게 친구를 부르며 우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그렇게 애타게 불러 보았던가? 누군가를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했던가?’ 되돌아봅니다.

건강도 꿈도 희망도 잃었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나 자신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었던가? 아파서 누워 있던 동료 수녀님들의 방문을 두드렸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투정 부리고 떼쓰던 어린이들, 툴툴거리던 청소년들을 얼마나 안아 주었던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연대의 끈을 놓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목소리로 저를 불러 준 이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자매애로 방문을 두드려 주었던 수녀님들, 기도로 응원해 주신 분들, 장난기 어린 어린이들의 맑은 얼굴, 올해도 저에게 손짓하는 드높은 하늘과 고운 빛의 가을 나무,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계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렇게 일어나 걷습니다.

“친구야, 나와서 같이 걷자!”는 예수님의 목소리로 하루하루 희망을 품고 일어납니다. 오늘도 성모 동산을 돌며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목소리를 저 자신에게 들려줍니다. 아픔과 고통, 절망으로 방 안에 계신 분들께 소리 내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 할지 모를 우리들. 포기하지 맙시다. 쓰러지지도 맙시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김지선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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