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원규 시인이 노숙인에게-3

▲ 사진/한상봉

모방과 창조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글을 쓰는 것은 모방입니다. 모방을 안 하고서는 창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3차 모방 정도를 창조라고 봐요. 3차 모방 정도가 되면 모방과 창조가 섞여있어서 헷갈리는 정도가 돼요. 예를 들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고 합시다.

시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면 우선 그 시를 한 번 베껴봅니다. 그러면서 ‘김소월은 진달래꽃이라고 했는데 나는 산 수유꽃이 더 좋아.’ 이런 생각이 들면 다른 꽃으로 바꿔요. 김소월은 ‘나보기가 역겨워’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네가 역겨워’이렇게 내 식으로 조금씩만 바꿔봅니다. 그 다음 김소월의 시는 치워 놓고 내 시를 베끼면서 또 내 식으로 바꿔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김소월의 시를 모방했는데,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 등을 거치면서 내 삶을 모방하는 게 돼요. 한 2단계 까지는 김소월의 냄새가 너무 납니다. 3단계부터는 꽃 이름도 바뀌고 내용도 바뀌면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모방이 없으면 창조는 나오지 않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가 있어요. 무슨 노벨상 받은 시인의 시도 아닌데요, 몇 년 동안 이 시를 넘어선 시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쓴 시에요. 저는 이 학생한테 콤플렉스를 느껴요. 최고의 시에요. 제목이 ‘송아지’입니다.

송아지의 눈은 크고 맑고 슬프다
그런데 소고기국물은 맛있다
나는 어떡하지?

이 시를 넘어선 시가 없어요. 이 시를 만약 고운이나 신경림 선생이 썼으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천상병 선생이 썼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만한 생태시가 없는 거예요. 이 친구는 고민한 흔적이 있어요. 송아지의 눈을 본 그대로 썼는데, 고기는 맛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이 시를 읽은 상대방이 ‘맞아, 나도 그랬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소통이 돼요.

왜 루저의 길을 택했나?

왜 하필이면 루저의 길을...참 어려운 말인데요. 제 생애를 돌아보면, 되도록 어려운 길을 택하고, 욕먹을 짓을 덜 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어려운 시절도 있었어요. 저는 대학 졸업장이 없고, 고등학교 다닐 때 중으로 있었습니다. 정식 중이 아닌 행자승이었어요.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것은 25살 넘어서 처음 알았습니다.

절에서 처음 내려와서 할 게 없을 때 광산 뒷일을 도와주고, 그 때 오토바이를 배웠습니다.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대학에 와서 책을 보게 되고, 노동운동을 했어요. 먹고 살만한 대학생들이 노동자들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그런 활동을 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그렇다면 광산으로 가야겠다 생각해서, 광산에서 일하는 가운데 시를 쓰게 됐어요. 시를 썼는데 두 군데서 당선이 됐어요.

문학을 배운 적은 없어요. 절에 있을 때 한 고시생이 놓고 간 세계 시 명작들을 모아둔 책을 보고 또 봤어요. 할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게 시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이런 생각으로 시를 써보기 시작했어요. 광산에서 일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하고, 이런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때 제 문학의 틀도 바뀌었어요. 지금까지의 문학은 가짜다, 이런 생각으로 문단 데뷔했던 것 취소하고, 실천문학이라고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쪽으로 바꾸었지요.

지리산학교는 무엇인가?

지금 저는 ‘지리산 학교’라고 하는, 돈은 안 받지만 기름 값 정도는 받는 학교를 만들었어요. 교실 없이 움직이는 학교입니다. 도자기반은 도자기 만드는 곳에서 모이고, 목공예반은 목공예실에서 모이고, 시문학반은 아는 찻집에서 모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모든 학생들이 모이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면사무소의 강당을 빌립니다.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 귀농한 사람들도 오는데, 그럼 인연이 생깁니다. 그 중 누가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면 일당을 받고 일할 수도 있겠지요. 실생활에 유용한 생활예술을 배울 수 있는 과가 있어요. 천연염색반 같으면 한 1년 배우면 누구든 자기가 염색해서 팔거나 전시할 수 있게 합니다. 시문학반 같은 경우는, 농사를 지었을 때 팔기 힘든 것처럼, 그럴 때 블로그를 만들어서 사진 찍어 글과 함께 올리면, 그걸 본 사람이 연락하면 직거래가 되잖아요. 중간 값 안 떼이고 받을 것 다 받으면서, 도시에 인연도 생기고요.

도시 사람도 좋은 게 여기 놀러왔는데 잘 때 없을 때 그 집에 와서 잘 수도 있잖아요. 이런 목적으로 만든 게 지리산 학교인데 돈 하나도 안 들여도 흑자이고, 인기도 좋아요. 좋은 인연들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대정부 투쟁 등으로 싸울 땐 싸우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저도 도움을 받으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 저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기득권 가진 지성인들,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는가?

있겠지요. 세상의 모든 게 그렇지요. 돈 잘 벌고 그렇게 살다 왔는데 행복하지 않다, 이건 아닌 것 같다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시골로 많이 옵니다. 삶의 마인드, 생각을 바꾼 것인지요. 생태적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든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살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다가 다른 삶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도 있지요. 인류 문명에서 저는 이렇게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요. 소수이긴 한데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고 있어요. 저는 이런 귀농이 문명사회에서 좋은 징조라고 봅니다.

그게 다 개인의 건강을 신경 쓰는 것 아닌가?

그런 문명사회의 흐름 자체가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왜 건강이 무너지고 있는지 알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걸 깨달으면서 일단 걷는 것으로 갑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마라톤 같은 걸 하다 보면 생각이 조금 씩 바뀌어요. 산은 이렇게 좋고, 거기서는 스트레스 받지 않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남을 죽이면서 살아야 하나, 왜 미안해하면서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건 좋은 것이지요. 건강을 생각하면 예전에는 다 헬스장에서 뛰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다 밖으로 나와요. 아직 멀었지만, 자연과 인간의 대립 관계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박남준 시인이라고 있는데요. 통장에 자기 장례비용 200만원만 있습니다. 돈이 조금만 생겨도 주위 사람들 술 사주거나 어려운 사람들 쌀 사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 시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요. 일반 사람들은 사고 당하면 누가 병원비 대 줍니까? 별로 없지요? 이 시인은 병문안이 줄을 이어요. 그리고 서로 병원비를 내겠다고 해요. 병원비를 서로 내겠다는 사람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이런 삶이 옳은 삶인데 도시적 삶,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는 이게 안 되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자본주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요. 그 안에서 어떻게 더 행복함을 찾아낼 것인가 이것이지요.

빌 게이츠 같이 30조를 기부하는 사람의 심리는 대체 어떤 것인가?

그 사람은 많이 번만큼 많이 내놓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서양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는 것도 있고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하는 게 있어요. 어떤 부잣집 쌀독에 쌀이 늘 있습니다. 아무나 한 됫박씩 퍼 갈 수 있어요. 쌀이 없는 사람이 쌀을 퍼갈 때 자존심 상하지 말라고 남이 눈에 안 띄도록 구석에 놓여 있습니다. 그 집 며느리가 하는 일은 늘 아침 일찍 그 쌀독을 채우는 거예요. 그런 자세를 가진 ‘청부’들이 존경받지요. 

그렇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은 많이 가졌다는 것인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뺏은 것 아닌가?

사실 청부(淸富)도 말이 안 되지요.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 것을 뺏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지만 그렇게 나눠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공동체 생활할 계획은 없나요?

사람은 붙여 놓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공동체 꾸리면 한 3년은 잘 가요. 변산 공동체도 확 무너졌다가 다시 살아났지요. 공동체의 규칙이 많이 생기면 인간은 못 견디게 되어 있어요. 못하게 하는 것을 하게 하는 쪽으로 가야 해요. 너는 기타 배워라, 너는 바느질 잘 한다, 이렇게 업(up)되는 쪽으로 가야하는데 자꾸 조이다 보면 나중엔 골수분자 몇 명만 남아요.

서로 상처 입고 떠나는 경우가 생겨요. 저는 느슨한 공동체를 좋아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낮아진 상태에서 서로 인정하고, 조금 떨어져 있어 보아도, 안 가 봐도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끝)

이원규 (경북 문경 출신으로 노동해방문학 창작실장, 한국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 중앙일보 및 월간중앙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지만 결국 지리산에 입산해서 12년째 살고 있다.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며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버림으로써 가벼워지고 비움으로써 여유로워진다고 하며,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손이 아닌 발로 시와 편지를 쓴다. 최근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생명평화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제16회 신동엽 창작상과 제2회 평화인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강물도 목이 마르다>,<지리산 편지> 등의 책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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