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사회 -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나영정, 김순남, 김호수, 변미혜, 오진방 외 17명 , 와온, 2020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과 ‘시설’이 얼마나 밀접한가에 대해, 몇 년 전 인권교육 활동가 동료 하나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흔히 산부인과나 조산원에서 태어나 산후조리원을 거쳐 어린이집, 유치원, 각급학교와 온갖 일터를 통과하고 장례식장에서 죽는데, 사람이 거쳐 가는 그 공간들이 거주/수용시설과 얼마나 다른가, 그가 했던 질문이 책 읽는 내내 떠올랐다.

통제 가능한 몸, 관리하기 편한 존재

김순남이 언급한 대로 시설화가 ‘시설 내부에서 작동하는 규율체계일 뿐만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의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36쪽)이라면, ‘말 잘 듣는 노동자’의 조건을 구성하며 노동자가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규율체계를 갖춘 일터는 시설화된 공간일 수 있다. 노동자가 ‘느끼지 못하게, 꿈꾸지 못하게, 관계 맺지 못하게’(42쪽) 만드는 일터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고자 하는지 생각할 기회를 차단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국가는 이 같은 ‘날것’ 그대로의 거리를 불순하게 여겼다.... ‘날것’의 신체, ‘날것’의 행위는 ‘비정상’으로 호명되어 훈육의 대상, 정상화의 대상이 된다.”(118쪽)

특히나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정상적이고 일할 수 있는 몸’이 되라는 일터의 규율은 감옥, 정신병원, 온갖 쉼터와 보호소 등 수용시설의 규칙과도 유사하다. 청소년들에게 거창한 장래 희망(사회가 용인한 욕망)을 품게끔 요구하지만, 각자의 욕망과 삶의 방향을 제대로 탐구할 기회는 주지 않는 학교와 가정의 교육 역시 비슷한 감각을 습득할 것을 강요한다. 성공과 부를 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를 과하게 하는 건 문제가 안되지만, 좋아하는 게임이나 음악에 몰두하는 일은 잉여 짓, 쓸데없는 짓이 되기 쉽다. 당장의 성과를 만들지 못하면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하는 사회에서 정상성은 생산성을 확보한 몸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일터에 맞는 몸이란, ‘통제 가능한 몸’(39쪽), 관리하기 쉽고 다루기 쉬운 몸이다.

"시설사회 -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나영정, 김순남, 김호수, 변미혜, 오진방 외 17명 , 와온, 2020. (표지 출처 = 와온)<br>
"시설사회 -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나영정, 김순남, 김호수, 변미혜, 오진방 외 17명 , 와온, 2020. (표지 출처 = 와온)

‘경력으로 인정되는 경험’, 쓸모 있는 몸

결혼하고 집안 살림을 관리하던 나는 몇 개월 전 남편에게 경제권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이제 내가 그의 월급을 확인해 얼마간의 용돈을 남겨 두고 내 통장으로 옮겨 오던 일은 할 수 없고 대신 남편이 한 달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 억울한 마음에, 어디라도 취직을 하고 싶었지만 더는 임금노동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일한 기간이 1년을 넘긴 곳이 얼마 없다. 조직 부적응자다운 이력서를 어디에 내밀 수 있을까. “남의 돈 받고 살기가 얼마나 어렵나, 다 더러운 꼴 참는데 왜 넌 그걸 못 버티고 툭하면 나오느냐”는 말은 회사를 옮길 때마다 들었던 비아냥이거나 꾸중이다.

한편으로 살면서 쌓는 경험은 왜 임금(혹은 활동비)이라는 정기적인 급여를 중심으로만 ‘경력’이 인정되는 현실에 의구심이 생겼다. 딸, 아내, 엄마로 살아온 시간, 정기적인 활동비 없이 살아온 활동가로서의 시간은 왜 ‘경력’이 되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의 사적인 ‘보호’ 아래 수십 년간 가사노동, 돌봄노동, 성적 노동을 무급으로 수행하고 있는 장애여성이 훨씬 많지 않을까?”(17쪽)

돌봄노동이 가능한 장애/비장애 여성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일이 되도록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집에서 돌봄노동을 조금이라도 수행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인의 경우도 유사하다. 작업장을 유지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므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보호작업장에서 숙련된 장애인 노동자들은 일이 손에 익고 노동과정을 잘 익히면 시설에 포함된 작업장을 벗어나 다른 일터를 찾아야 하지만, 대부분 나가기 어려운 것이 또 현실이다. 장애인은 나가기를 희망하고, 시설은 내보내야 하지만, 같이 일하는 상태를 이어가는 편이 (시설 입장에서는)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순환이 반복될수록 장애인 노동자가 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고, 동시에 다른 노동을 경험할 기회, 더욱 숙련된 노동자가 될 기회마저 박탈당하게 된다.

분절된 노동, 특정하고 반복적인 일터의 리듬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아주 단순한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을 면접조사했던 활동가는 이런 노동을 ‘파편화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떠오르는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는 작업을, 장애인 노동자들은 매일 할당받는다. 물론 이런 노동 방식은 시설 보호작업장은 물론이고 수많은 제조업 공장에서 유지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왜 그런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걸까.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몸을 맞추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야만 노동자를 통제/관리하기 쉽기 때문일 테다. ‘(노동자의) 몸은 (일터의) 권장된 리듬에 ‘맞춰’’(104쪽) 적응해야만 한다.

초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더 이상 모든 노동 과정을 통합적으로 계획하고 구상하기 어려워졌다. 하루, 한 달, 1년의 계획을 구상하던 때는 아마도 원시 공산제 시절?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기 전인 봉건제 시기? 언제가 됐든 너무 오래전이다. 분업화, 분절화된 노동이 자리 잡은 공장과 일터에서, 일에 익숙하지 않은 누구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구인광고가 넘쳐나지만, 과연 그런가. ‘인간을 기능으로 소환하는 곳’(37쪽)이 바로 시설이라면, 일터 역시 시설과 닮았다. 어쩌면 누구도 숙련 노동자로 남겨두지 않는 사회, 분업이 작동되는 사회, 그래서 빈자리에 노동력을 떼었다 붙이기 쉬운 노동 유연성이 최적화된 사회, ‘리드미컬한 일터’의 속도에 적응하라는 요구만 남은 사회가 바로 ‘시설사회’ 아닌가.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서서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amp;nbsp;EBS 컬렉션 - 라이프스타일 유튜브 채널 갈무리)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서서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EBS 컬렉션 - 라이프스타일 유튜브 채널 갈무리)

불안정한 삶을 위해 허락한 ‘강제노동’

김현철은 “‘회로망’은 단순히 닫혀 있는 도식적인 회로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95쪽) ‘감금회로망’이라는 말은 시설과 시설 간의 이동과 순환, 그리고 그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들로 인해 작동하는데, ‘감금’이라는 단어는 장시간 노동과 강제노동으로 떠오르게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끝 모르는 노동이 주어지는 일터에 노동자들을 가둔 채 관리하려는 시스템은 일터와 시설을 닮아가게 하는 듯하다. 기계보다 사람값이 더 싼 세상. 간병인을 쓰기 전에 노는 식구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는 사회에서, 한 해 노동자 2000여 명이 일하다 죽는다. 코로나로 가족을 챙기느라 진이 빠진 수많은 아내/엄마의 호소에도 가족에게 떠넘겨진 돌봄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안정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출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최저 임금이 최고임금이다. ‘특정한 시민의 역량을 박탈하는 권력이 시설화를 유지하는 핵심’(27쪽)이라면, 불안정하고 강제적인 노동이 누군가에게 떠맡겨지는 현실에 도전하는 일이 시설화된 사회에 틈을 만들게 될 테다. ‘시설화가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많은 존재의 삶과 연결될 때 시설 안팎의 경계가 모호해진다.’(36쪽)

‘소통 불가능한 타자와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것’(219쪽)이 탈시설을 위한 실천이라면, 시설화된 사회의 노동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노동자를 ‘무력화/불능화 하는 구조’(26쪽)인 일터에서 ‘소모되는 노동과 천천히 찾아오는 죽음에 저항’(30쪽)하기 위해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운동들의 연대(109쪽)를 만들어 가기 위한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 "시설사회"를 통해서 그런 토론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기를 바란다.

림보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에 참여해 "회사가 사라졌다"를 펴냈다. 노동자로 살면서도 나를 노동자로 부르지 않았던 때, ‘청소년노동인권’이라는 말을 만났다. 인권교육과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을 주로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늘 오리무중. "십 대 밑바닥노동", "체벌 거부 선언"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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