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지난 2월 말, 송파구 석촌동 어느 단독주택의 반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슬퍼하는 이는 별로 없어보였고, 일주일 뒤 대통령은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고 있는데, 그 모양을 보자니 절로 술 생각이 났었다.

“대통령님, 이럴 때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거겠죠? 혹시 기초생활수급제도에 대한 원고를 당신이 쓴 게 아니라면 그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공무원 양반의 거취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하고 충언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대통령이 복지제도를 알리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시자, 묘하게 언론들은 생활고로 목숨을 던지는 이들에 대한 보도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술 생각에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는 마지막 문장이 유명하단다.

그래, 사회는 술을 권하고, 교회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죄책감을 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이번 기고의 주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으면서 섹슈얼한 주제에 대해서는 왜 고리타분하게 구는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어느 불량신자의 고뇌’ 쯤이 될 테다.

‘기지촌 여성을 위해 오신 예수님’

최현숙 씨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라는 책에는 세 명의 80대 여성 노인의 삶이 담겨 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삶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첫 번째에 등장하는 김미숙 할머니.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사다. 할머니는 체격이 크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데, 책의 곳곳에서 그 연배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김미숙 할머니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기지촌 여성들에게 옷 장사로 생계를 꾸리다가 미군들에게 성매매까지 하게 되었고 그 일로 모은 돈을 종자로 삼아, 하나 있는 아들을 공부시켜 목사로 키운 것이다. 그런 아들이 팔순이 넘는 노모를 위해 새벽기도 때 “우리 어머니에게 회개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하고 통성기도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목사인 아들은 어머니의 삶의 역정(歷程)을 부정하고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에 대한 할머니의 술회를 그대로 옮긴다.

“언젠가 아들이 나 붙들고 조용히 말도 하더라구. 미군 부대 근처에서 몸 함부로 굴린 거랑 낙태 많이 한 거랑 그런 거를 회개를 하래는 거야. (……) 다른 회개래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 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거기서도 미군이랑 살림하던 여자들은 많이들 낳았어. 남자 붙잡아 놓을래니까, 남자가 낳자 그러면 낳는 거지. . (……)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낳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 (……) 그리고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온 건데? 저 목사 된 게 내가 양키 물건 장사하고 미군이랑 살림해서 번 돈인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 돈으로 공부해서 목사 된 지가 할 소리냐? 회개를 하려면 에미가 뼈가 빠지게 고생한 돈 갖다 쓰기만 한 거를 회개를 하던가 해야지. (……) 지네들 하나님은 어떤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

이 책을 읽다가, 내 부모와 얽힌 나의 삶까지 되짚어보았다. 나의 부모도 이혼했고, 각자 다른 이들을 만났다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고, 우리 세 남매는 각자 그런 무게감을 버티며, 그들의 삶을 가끔은 외면하고, 비난하고 또 동정하기도 하며 살아 왔으니…….

사람의 삶이란 게 그이의 의지대로만 풀려가는 건 아니란 것을 대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미숙 할머니도 어렵고 힘든 인생의 굴곡 가운데, 미군들과 살림 차리며 살던 그 시기에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고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았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의 삶 중에 가장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던 시절이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편견으로 쉽게 그때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던 할머니는 최현숙 작가와 세 번째 만남에서 그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한 김미숙 할머니의 하느님과 나의 하느님이 퍽 닮아 있어 반갑기도 했다. 내 부모에 대한 비난과 무시의 마음을 품었던 어느 때의 나에 대해 깊은 반성도 하게 되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으로, 교회의 교리는 그런 삶의 맥락을 다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에만 문제를 제기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혼전 성관계에 죄책감을 느껴야만 ‘좋은 신자’일까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에서 모임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모임에 20대 초반의 여성 신자가 있었다. 그이는 남자친구와 연애 중이었다. 연애하다 보면 스킨십의 단계가 꽤 깊어지기도 하기 마련. 역시 그이는 그 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걸더니, 자기는 남자친구와 종종 성관계를 하게 되는데, 나름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인지라, 잠자리를 갖는 날이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결혼하기 전에 같이 자면 간음인가요? 우린 아직 어리고, 결혼을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너무 죄책감이 생기니까 힘들기도 해서 신앙을 버릴까 싶기도 하네요.”

우리가 별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자기 속내를 비치는 그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죄책감으로 자기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 분인데,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좀 다른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 일인데, 그 사랑의 한 과정일 뿐인 성관계만 문제 삼고, 나쁘다고 꾸짖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이가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약간은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남자친구와 사랑하라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냐며, 연애도 못 하고 있던 시절이라 나는 당신이 좀 부럽다고 덧붙이면서.^^

죄책감 없는 교회, 반성하지 않는 교회가 부끄럽다

본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교무금을 많이 못 내서 미안하다는 할머니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자녀들에게 겨우 용돈 받아 하루하루 살기 어려운 분들일수록 헌금 많이 내는 이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성당에 빚진 마음이 들어 나오기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교회 안에 있다 보면 이렇게 죄책감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방식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혼전순결이나, 성정체성, 성적 지향 등의 섹슈얼한 문제든, 이혼 등의 가정 문제든, 금전 문제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마음 앓이를 하시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나날이 세상 속에 공존하면서 세상과 빠르게 닮아 가는 가톨릭교회를 보고 있자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주체는 교회가 돼야 할 것 같은데, 우리 교회의 착한 신자들은 자기 속만 긁어댄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교회를 보고 있자니, 나 같은 불량신자는 종종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그 자괴감이란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온다면, 이러저러한 현실에 좌절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선택을 할 것만 같아 생기는 것일 테다. 교회가 예수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더라도 밀양 할매나, 거리의 노동자들, 세상 속의 소수자들이 그의 친구가 되어줄 테니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자괴감을 거두어야 하려나.
 

림보 (필명)
장래희망 있는 여자

이번 회로 림보 님의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연재를 마칩니다. ‘교회 노동자’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나눠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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