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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자각[강신숙 수녀] 10월 25일(연중 제30주일) 탈출 22,20-26; 1테살 1,5ㄴ-10; 마태 22,34-40

지난해, 누구도 팬데믹이 덮친 시대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때, 우리 대부분은 2020년을 계획하고, 나름 일정표를 짜며 여느 해와 다를 바 없는 한 해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새해 벽두에 우린 온통 뒤죽박죽인 채 모든 일정을 취소당해야만 했다. 이미 잡힌 혼사를 미뤄야 하는 청춘남녀들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연을 담은 일정들이 끊임없이 유예되다가 무산되는 일로 이어졌다. 일상은 시공간을 틀어쥔 팬데믹에 의해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부자유의 극치를 관통 중이다. 이러다가 다들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기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불편을 불편으로,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여겨야 바로잡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면역력이 생겨 지난 2월만큼이나 공포스럽진(?) 않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거대한 응급실이다. 전 국민이 수술실 외과용 마스크를 쓰고 어딜 가든 체온과 손소독은 필수며,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생활방역을 지키라는 비상방송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될 풍경이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정말 이러다가 모든 의식구조가 질병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사회적 거리두기가 몸에 배어 어느 날 우린 서로를 잠정적 기피 대상으로 여기고 기피가 혐오로 바뀌다가 점점 더 안전한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끼리끼리로 굳혀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지배적 문화가 공연한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가 집단적으로 합의한 것이 개인의 무의식적 선택과 배제에 영향을 끼친다면, 욕구라는 것, 사랑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집단의 욕구이고, 집단이 선호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내린 선택이 실은 집단적 무의식에 영향을 받은 결과인 줄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집단적 무의식에 포섭된 개인이란 이미 자율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집단의 평판이 내 미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권력인데 이런 공동체나 사회에서 개인이 공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한 사회가 기피하는 자들을 편든다는 것은 충분히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탈출기의 “약자 보호법”(22,20-26)은 이런 현실적 편견을 전제한다. 신이 이방인이나 과부, 고아들을 “억압해서도 학대하거나 억눌러서도 안 된다고, 그들이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20-22)이라고 다짐하는 데서 “자비”의 정체가 드러난다. 신의 공정과 사랑은 사회가 배제한 이들을 다시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고 집단적 선택에 저항하며, 은폐된 이들을 보이도록 노출시키는 일이다. 신의 자비는 사회가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 “보고, 듣고, 말하게” 하는 데서 온다. 누가 공동체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선호하는 것이 왜 그런 것인지도 따져 물어야 한다. 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함부로 착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런 행위가 그 사회에서 정당성을 취했다는 방증이다. 아무도 의식적으로 나쁜 일을 결심하고,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물론 뇌가 고장난 사람들은 예외다.) 집단이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일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kist)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적 행위가 위선일 수 있는 이유도 불의한 구조는 건드리지 않은 채 현실을 왜곡하고 환영을 연출해서 그렇다. 무엇이,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지, 어떤 길이 정의롭고 자비로운 길인지를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어서다. 자선을 공정한 일처럼 포장하는 일만큼 착시를 일으키는 행위도 없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자비로운 길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배제를 보기 위해선 현실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렇게 나오고 들어가는 자유를 우린 ‘자각’이라 부르고, 또 그것을 해방이라고도 부른다. 예수가 한 사회의 집단을 고정시키고 묶는 자들을 저항해 나갔던 이유도,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들고 해방을 선포하며 악령을 몰아낸 것도 모두 그런 연유다. 그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오늘 복음의 가장 큰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질문한 율법 정신은 예수와 완전히 다른 대척점에 서 있다. 율법학자는 위선으로 성경을 정당화하는 일에, 예수는 그들의 위선을 벗겨내는 일에서 핵심을 찌른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마태34-40)하라는 계명은 사랑이 본질적으로 “해방(치유와 회복)”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환영에 사로잡힌 세계, 거꾸로 매달린 세계, 모두를 묶어 놓고서 자유로워지라고 주문을 외우는 세계에서 사랑은 기만이다. 그래서 애초에 쉬운 사랑이란 없다. 내 스케줄을 방해하고, 비호감적 인물에게 시간과 노력을 내주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가 비유로 든 착한 사마리아인의 진실은 우리 모두가 예리고의 상처받은 자임을 일깨운다. 죽을 위험에 처해 본 사람만이 내게 베푼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래야 자신을 피해 달아난 인물들이 실은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자각은 빠스카와 같은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무의식적 배제에서 빠져나오려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필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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