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신학과 영성 지금여기 강론대 강신숙 수녀 강론
생존자의 나라[강신숙 수녀] 11월 22일(연중 제34주일) 에제 34,11-12.15-17; 1코린 15,20-26.28; 마태 25,31-46

"나는 내 손으로 나의 다섯 아이를 묻었다. 누가 죽더라도 슬피 우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가 세계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으며 형제가 다른 형제를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 갔다. 돈이나 우정이 시체 묻을 사람을 찾아 주지는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망자를 데려다 구덩이에 넣었다. 사제도 없었고 기도도 없었다."("하드코어 히스토리", 47-48) 이 글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페스트의 생존자 '아뇰로 디 투라'의 회고문이다. 책의 저자 댄 칼린은 페스트 이후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 현상을 두고 '고요한 비극'이라 칭했다. 당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실상 혼자서 이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아채지만 못했을 뿐 '사제도 없고 기도도 없었으며 모두가 서로를 버렸을 때'조차도 그들 곁을 지킨 이가 있었다. 예수가 그러했다. 그는 재난을 당한 한 사람으로 그들과 함께, 그들이 되어 있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마태 25,35-36) 최후의 심판은 구조의 요청을 기다리는 사람이 예수 자신이었음을 알린다. 심판은 두려움과 공포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 함께 살아 돌아오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이야기며, 어떤 경우라도 생존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심판자의 이야기다. 예수는 그렇게 구조를 요청하는 자인 동시에 구조하는 자로 나타난다.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마지막 생존자요, 최후의 구원자다. 사람들에게서 최후의 심판이 너무 뻔하고 식상하게 다가오는 것은 예수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고, 자신이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다. 그들은 예수가 단지 자신을 시험하려고 ‘불행한 사람’ 코스프레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랴. 예수의 현장은 벼랑 끝에 선 자들이며, 그 사람들의 통치자요, 심판자인걸.

나무늘보. (이미지 출처 = Pixabay)

찰스 다윈은 진화론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니며 변화하는 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생태계의 최종 승자가 힘센 공룡이 아니었듯이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다윈의 오랜 관찰에 의하면 살아남은 종의 입장에서 ‘생존’이란 그 자체로 승리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이든 역병이든 혹은 냉혹한 약육강식이든 살아남아서 자신의 종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특히 약자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다윈은 약자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모두가 차지하려는 경쟁에서 벗어나 더 열악하고 척박한 곳을 택한 데서 찾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 나무늘보의 생존이 그러하다. 나무늘보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전략으로 재규어와 같은 맹수들의 감시망을 피했으며, 먹이 전쟁에서도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을 취해서 공격을 피해 갔다. 나무늘보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무늘보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동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약자에게서 생존전략이란 강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서 삶의 기회란 조금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해 가는 일이다. 어쩌면 약자들에게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땅은 힘센 자들의 차지고, 그런 땅은 항시 약탈과 피의 대상으로 얼룩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자들의 생존전략이란 가능한 덜 매력적인 곳, 버려진 터로 이동해 둥지를 트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자손손 평화롭게 살아갈 담보가 될 수 있다. 성경은 그렇게 낮은 자리로 이동하면서 자신의 식솔들을 지켜낸 한 사람,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롯과 자신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날 것을 우려해 조카 롯에게 기름진 땅을 내어주고 자신은 척박한 땅으로 물러난다.(창세 13,8-18)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롯이 차지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유황불로 종적을 감추게 되고, 아브라함은 그 끔찍한 재난에서 벗어나 자신의 여정을 지속해 나갔다. 예수는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마태 11,21-24)며, 이 운명의 갈림길에 선 두 부류의 사람들을 이렇게 언급한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25-26)   

이제 21세기 지구인들이 직면한 현실적 팩트는 강자, 약자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모든 국가, 민족들은 오직 한 가지 화두,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직면한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모두 다 대동단결해서 지구촌에 불어닥친 죽음의 광풍을 몰아내고, 어떤 삶의 방식이 미래를 구할 것인지에 전념할 일이다. 오늘 그 고민의 시작을 교회가 작심하고 선포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그러하다. 이 기다란 타이틀에 인류의 미래가 고스란히 달려 있다. 핵무기로 무장된 군사력과 돈과 권력을 신으로 섬기는 약탈자들에게 예수는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인류가 재난을 통과할 길은 그의 통치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똑똑한 자들’에겐 예수가 죽음과 생명을 쥔 최고의 통치자라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넌센스겠지만, 그러나 보라, ‘최후의 심판’을 통해 드러난 왕의 모습을,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나라는 모두가 살아서 돌아오는 생존자들의 나라,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부러진 양은 싸매 주며,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는"(에제 34,15-16) 그런 나라다. 가장 약한 자를 중심에 세우고, 나무늘보가 안녕한지를 묻는 그런 나라인 것이다.

오늘로 강신숙 수녀의 강론 연재를 마칩니다. 2년 3달 동안 격주로 영의 양식을 전해 주신 강신숙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