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신학과 영성 지금여기 강론대 강신숙 수녀 강론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등불[강신숙 수녀] 11월 8일(연중 제32주일) 지혜 6,12-16; 1테살 4,13-18; 마태 25,1-13

예수의 ‘하늘나라’는 긴박성을 띤다. 예수가 시대의 표징을 언급하면서 딱 짚은 인물 중 하나였던 요나만 봐도 그러하다. 요나는 니네베 도시에 파국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며 즉각적 회개를 요청했고, 이에 니네베는 왕과 온 백성은 물론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단식과 회개로 돌입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었다: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8-9) 요나의 말을 들은 니네베는 마침내 파국을 면하고 평화로이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었던 예수 역시 유대와 예루살렘의 파국을 내다보았다. ‘하늘나라’는 예수가 파국을 막기 위해 전부를 걸은 사명의 핵심이고 비유는 그 선포 방식 중 하나다. 그의 비유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왔지만 언제나 그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익숙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가 하면, 일상을 뒤집어서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 그들을 움직이는 인생 전체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갔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힘의 세계와는 화합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가르침과 행동이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곧장 깨달음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때로는 구경꾼이거나 단순한 가십거리로 소비했다. 그들은 좀체 그가 초대하는 땅으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예수는 사람들이 언제든 자신의 옷자락을 잡도록 곁을 내주고, 몰려드는 인파들 앞에서 기꺼이 그들의 목마름과 허기를 채워 주었다. 예수는 지혜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주고, ....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주었다."(지혜 6,13-16)  

등불을 가지고 있는 다섯 처녀와 등불이 없는 다섯 처녀.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는 사람들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거치게 되는 희노애락의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에 몸 붙여 살기를 바랐다. ‘열 처녀의 비유’도 그런 일상 속의 풍경에서 왔다. 그 풍경 속에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하늘나라는 시작되었고, 존재하면서 변화를 만들어 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 남녀만의 사건이 아닌 혼인은 온 집안 식솔과 마을 전체의 사건이다. 예수는 당시 유대의 결혼 풍습을 통해 관습에 매몰된 ‘혼인 잔치’에서 진정한 혼인을 구제하고자 했다. 구원된 혼인은 모든 일상에 하늘나라가 결정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과 그 공동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슬기로운 처녀를 맞이한 신랑이 잔치를 위해 들어선 ‘문’은 이미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 ‘문’이며, 그 문은 우리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이 오면 불을 밝히고 신랑과 함께 그 문으로 들어설 것이다.

유대의 결혼 풍습은 우리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신랑이 약혼녀를 데리러 가는 때가 주로 밤 시간에 이루어진 것은 폭염을 피하려는 근동 지방의 풍습으로 보인다. 신랑이 신부를 찾아가는 시간도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수는 하늘나라를 ‘느닷없이 출현하는 신랑’에 빗대어 선택된 처녀와 그렇지 못한 처녀의 운명을 가르고, 파국과 구원이라는 긴장을 일으킨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이런 순간은 피할 수 없는, 그리고 반드시 직면해야만 하는 '순간'(kairos)이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어떻게 오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때’가 우리 방식처럼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때는 이미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등과 기름에 의해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러니 각자는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다.(마태 25,4) 신랑은 칠흑 같은 한밤중에 나타날 것이고 등불은 신부를 알아보는 유일한 표지가 될 것이다. 신랑은 어둠을 가르는 빛의 존재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겠지만 어둠에 묻혀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자를 배우자로 맞이할 수는 없다. 이미 없는 존재란 어떤 것도 붙들 수 없으며, 어떤 것과도 이어지지 않고, 더구나 관계 맺을 수 없는 불능의 존재기 때문이다.

뒤늦게 당도한 다섯 처녀가 닫힌 문을 두드려 보지만 그녀들은 어둠과 빛이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녀들은 신랑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어 하나 이제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들이 듣게 될 신랑의 마지막 목소리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가 될 터다. 성경은 여러 차례 어둠과 빛의 정체를 밝혀 왔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9) 이미 빛의 존재는 이렇게나 단순하고 명쾌한데도 말이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3-4) 결국 처녀들이 등과 기름을 갖는 길은 하나다. 예수의 지혜로 자신을 밝히고, 그의 빛으로 빛을 보는 것이다. 그 빛은 모든 뭇 생명체가 생명을 얻고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가도록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일이다. 이것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밝힌 빛의 전모다. 우리가 비록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13) 해도, 설령 열 처녀처럼 조는 일이 있어도 크게 염려할 것은 없을 것 같다. 그분을 통하여 생겨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면 언제든 그를 맞으러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