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나무, 기자영의 <내 인생의 좋은 날>을 읽으며

▲"석수 아저씨는 한번 집어든 돌을 결코 다시 내던지지 않는다. 숙련된 눈썰미로 그는 적당한 돌을 골라내고, 집어들어서 크기가 맞지 않으면 망치를 휘둘러 조각을 내고, 톡톡 두드려 각을 죽이고, 여러 개의 면들을 이쪽저쪽 살핀 뒤 기어이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일기 중에서)   

"하늘땅이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고 했다. 그가 그렇게 노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디 그렇다. 사람들이 그런 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간혹 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 자영은 자신의 몸을 타고서[乘] 그 길을 가는데, 진도가 바다에서 가까운 그만큼, 이제 그 길을 거의 다 간 것 같다."

이현주 목사의 말이다. 기자영. 본래 이름은 기희선(레오나, 45세)이다. 광주 사레지오 여고를 졸업하고 학창시절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소외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일산에서 6년 동안 개원의로 일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마음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2000년에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뒤 진도 귀성마을에 살면서 명상공동체를 꿈꾸며 '자연의 집'을 지었다. 그녀는 다음 포털사이트에 '의식혁명'(http://cafe.daum.net/spiritrevolution)이라는 가상의 집을 짓고 사람들과 만났다.

▲"숨어 있는 바다 '이미'를 보러갔다. 이미는 우리 마을 뒷산 잔등 너머에 있는, 산의 양팔과 가슴에 안겨 있는 자그마한 바다다." 자영 씨의 소개로 산등성이를 올라가 바다와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바람이 세다. 나무들이 춤을 춘다.   

그녀를 처음본 것은 그래, 인터넷상이었다. 수년 전 나 역시 '인디고유니콘'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고, 불쑥 그곳에 찾아온 기자영 씨가 '진도'에 산다 했다.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서둘러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는 뜻이었을까. 그 이름을 들은 지 한 주일 만에 식구들과 진도를 찾아갔다. 그녀가 '이미'라고 이름붙인 그 해안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늑한 포구처럼 들어앉은 바닷가에 그녀가 당시에 살던 콘센트 집이 있었다. 마당엔 풀꽃들이 난만하게 피어있는.

첫눈을 마주치고서야 그녀에게 한 쪽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암을 선고받은 지 9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골반 한쪽을 쪼갰다. 한 다리를 부목에 의지한 그녀는 자주 마당에 섰고, 사이사이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녀와 밥을 나눠 먹었던 식당 뒤편 논에는 아직 쌀쌀한 초봄 자운영이 자줏빛으로 마구 번져가고 있었다. 생애처럼 아스라한 들판이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이된 종양으로 인해 골반의 절반을 쪼개어낸 후, 제 몸은 활동영역이 매우 좁아졋습니다.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대신에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놓게 되었고, 마음은 고요해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잘 놀릴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도, 가슴 깊은 곳에서 '그분'은 새로운 꿈을 주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수술과 항암치료에도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이 이루어져 갔기 때문이다. 흙으로 '자연의 집'을 짓고 작은 명상공동체를 꿈꾸었는데, 자신이 아픈만큼 뜻하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벗으로 도반으로 찾아와 주었고,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들은 결국 내 몸만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나의 분신인 벗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2년전 사진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러 서울이고 어디고 자동차 뒷칸에 누워서 다니곤 했다. 고모인 기숙희(요안나) 씨가 기사 노릇을 하고.. 그녀는 살면서 몇가지 원칙을 세워두었다. 그중 하나는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람과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통화 중에 간혹 그녀가 투병 중임을 잊어버리곤 했다.

여전히 몸은 편안했다가 아프다가를 반복했지만, 극심한 몸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 어떤 깨달음이 뒤이어 찾아오는 걸 느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바람에 한껏 몸을 맡기고 춤추는 나무처럼, 모든 상황과 흐름에 심신을 맡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자연이 그러하다.

2003년부터 그녀가 쓴 일기 중에서 83편을 가려엮은 것이 샨티출판사에서 펴낸 <내 인생의 좋은 날>이다. 그녀는 스스로 품은 시선에 따라서 매사를 '제 영혼을 위해 좋은 것'으로 바꾸어내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녀가 투병중에 번역해 놓은 책이 이름이 <기적수업>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것을 "오히려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문이요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앞으로 뻗어있는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요 풀꽃에게로 가는 길이요, 가이 없는 자비의 우주로 열린 길이었다. 사랑만이 중요한 길이었다. 그 길은 무너진 몸을 따라서, 바닥에 누워 낮아진 자세로 바라보는 하늘이었다. 벗들의 친절과 기도와 헌신이 흘러와서 '나'를 이루는 생명의 길이었다. 나는 나대로 따로 있지 않았고, 그들이 내 몸과 영혼을 이루어 동반하는 길이었다.

▲고요히 이승과 작별하고 있는 기자영 씨
그녀는 자신이 아프면서도, 그 아픔이 지구 어머니의 아픔을 나누어 앓고 있다고 여겼다. "지구 어머니의 젖가슴은 파헤쳐졌고 자궁은 황폐해졌다. 인류는 지금도 더욱더 파헤치고 잘라내어 쓸모없는 것들을 대량생산해서 쓰레기를 만들고, 어머니의 몸 여기저기를 더럽히고 있다. 어머니는 아프다. 나도 그 아픔의 일부이다."

은총뿐 아니라 죄의 연대성마저 나누어 갖는 기자영은, 자신이 이른바 정상에서 멀어져 갈수록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자각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움직일 힘이 없어서 가만 누워 있으니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만 바라보아도 탄성이 나온다고 말한다. "숨 쉬고 눈을 떠 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한 행복과 기쁨. 불편한 육체 속에서 빛나는 영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순간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을 성심으로 바라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민자, 앵자아줌마, 상심 씨, 그리고 강아지 진이까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하나밖에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깬 굴을 한 대접씩 가져오는 앵자아줌마에게 손사래치면, 아줌마는 "이잉, 주고 싶응 게"..."나는 만날 주고 싶어. 진짜여.."한다. 사람이 일하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는 그뿐이다. 다른 게 없다.

기자영 씨에겐 의식을 붙잡고 늘어지는 통증을 완화해주는'진통제'마저 무한한 감사의 대상이다. 더구나 아프느라 수고한 몸에겐 수시로 "고맙다"는 말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일기에서 <성공하는 일곱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 이야기를 한다. 그가 파산했을 때, 왜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내가 쓴 대로 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그래서 그녀는 "소리내어 말하자. 늘 사랑을 속삭이자. 몸아, 너 정말 사랑해. 이뻐. 그리고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영혼을 돌아보라고 권한다. "영혼의 충만함을 체험한 사람은 영혼의 메마름이 무엇인지도 안다고 한다. 불안에 휩싸일 때,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할 때,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외로울 때, 누군가가 원망스러울 때, 바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릴 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사람이 반갑지 않을 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일지 않을 때....이러한 순간을 대면할 때엔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다.

얼이 빠져서 깨어있지 못하면 영혼은 가슴속에서 움추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습관적으로 행하던 모든 것을 끊고 내면의 눈을 떠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고요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다시 충만함으로 평화로운 뒤라야 참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작은 것에서도 감탄할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지금 여기서 만나는 모든 순간을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게 된다. 

며칠 전에 기자영 씨가 누워 있는 포천의 모현호스피스 병동에 다녀왔다. 잘 정돈된 마당, 그녀가 좋아하고 남음직한 화초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닌 직원들 모습에서 '참 좋은 정거장'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는 약간의 혼수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병소(病所)가 부풀어오르고, 의사들은 '이별을 준비하라'고 귀뜸해 준 상태다. 가혹한 통증으로 인한 진통제로 정신은 가끔 혼미한 듯 하다. 정말 가벼운 몸이었다. 살갛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육신에 앉은 영혼 또한 가벼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얼마전 다녀간 이현주 목사님이 방명록에 간단한 말 한 마디 남겨두었다.
"레오나 자영에게..  축, 졸업! 그리고 입학" 

▲축 졸업, 그리고 입학.. 그렇게 다른 생애의 문이 열리고 있다.

이 기사 쓰기를 막 마쳤을 무렵,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기자영 씨가 오늘 이승을 떠났다"고.
"부고 기호만의 장녀 기희선(자영, 레오나) 2009년 8월 11일 03시 별세. 청주 하나노인병원 장례식장 501호. 발인: 2009년 8월 13일 08시)" 그녀의 여행이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들 것이다. 그 길에서도 여전히 안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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