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박상훈 신부]

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즉 가난하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명백한 진실을 잘 믿지 않는다. 물론 돈이 없다는 것이 자유를 제약하는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부유한 사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다.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고통을 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안해서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할 수단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누구나 저녁에 집에 가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집에 가고, 식사를 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하루 1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저녁 먹는다고 일터를 떠날 수는 없다. 이 현실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돈을 사용함으로써 제약 없이 살 수 있다. 돈의 결핍은 간섭받을 여지를 갈수록 넓힌다. 돈은 근력이나 건전지 같은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다. 돈은 사물의 형태를 지닌 사회권력이다. 그래서 돈을 단지 물리적 수단 혹은 자원으로 보는 것은 일종의 물신숭배다. 간섭이나 제약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의 성격을 감추고 한낱 어떤 물건이 결핍되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는 그것이 주는 자유에 있다. 물론 돈만으로는 우리가 찾는 자유를 모두 누릴 수도 없고, 돈이 주는 자유를 실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핵심은 이렇다: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가난하지 않을 경우보다 딱 그만큼 덜 자유롭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돈을 내지 않고 자전거를 집어 갈 자유는 없다. 그러나 가난한 내가 부유한 사람과 단적으로 다른 점은, 나는 돈이 없어 자전거를 가져갈 자유가 없는 대신, 지불할 돈이 있는 사람은 가져갈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모든 사람에게 이런 자유가 있다면, 인간복리와 인간권리에 관한 통념이 전복될 것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변화 가능성도 넓어질 것이다. 이런 시도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실현 가능한 것이 기본소득 기획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재난긴급지원금을 시행하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생계가 위태로운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어 응급처치처럼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지만, 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은 전혀 다른 배경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기본소득은 받은 현금으로 내수확대를 통해 경기침체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는 단기처방과 같은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분배 문제를 다시 보고, 사회적 부에 대한 권리를 재편성해서 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다시 살리려는 기획이다. 허용할 수 없는 불평등을 계속 유지하는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길은,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하나 하나다.) 기본소득 논의를 이끄는 이들 가운데 하나인 정치철학자 필립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이 “정의롭고 해방적인 사회를 만드는 분배의 핵심기제”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기본소득은 이런 목표를 위해 무척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모든 시민에게 적정한 수준(대략 최저생계비보다 약간 많은)의 현금을 매달 지급한다. 개인이 어떤 경제적 상황에 있는지(수입, 가계상황, 노동의욕 등)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보편적, 무조건적, 지속적, 현금 소득”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본권이 결여되는 것처럼, 실업과 가난은 자유가 박탈된 억압의 상태이며, 기본권인 ‘자유’가 부재한 상태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전폭적으로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다. 경쟁하는 개인과 규율 없는 시장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 있는 활동을 하고 또 그런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시키는 자유다. 자유는 강제나 간섭이 없는 형식적 자유나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가능성이나 역량을 뜻한다.

기본소득이 주는 가장 분명한 효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청소노동에 지쳐 버린 노동자가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자신에게 더 맞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청소노동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라 해도, 청소노동은 어느 사회에서든 필수적이므로 임금이 상승하면 청소노동은 의미 있는 노동으로 변화한다. 이 경우,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실질적인 자유와 역량을 최대화하는 결정적인 장치가 된다. 단 사흘 동안 서울의 청소노동자 전체가 파업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 도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기본소득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의 의미를 바꾼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노동과 생산, 고용과 발전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현재의 개발과 발전모델은 ‘생산우위’의 전제에 서 있어서,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는 보다 많은 노동을 해서 소득을 늘리는 것이다. 휴식과 여가, 가사노동, 분배노동(임금/생산 체계 바깥의 노동)은 노동의 특질을 실현하지 못하는 활동이 된다. 전통적인 산업사회와 달리, 이른바 디지털경제 환경에서는 고용유지와 소득보장이 안 되는데도 실직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고, 사회안전망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액화노동’(대표적으로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 노동)이 급증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자체가 임금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의 외부, 즉 시장이나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 외부가 부여한 인정과 가격에 종속되는 한 그만큼 자유는 소멸한다. 기본소득은 노동자가 ‘내부로부터’ 의미 있고 존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통로가 된다.

가톨릭 사회원리에서도 일의 가치를 생산과 임금의 기준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에서 “일의 가치를 결정하는 근거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이냐가 아니라, 인간이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고 말한다. 일은 상품을 생산하는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일은, 일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의 인격이 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일상에서, 그리고 한평생 엄청나게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는 인간을 경제성장과 임금노동에 기반한 가치체계 하나에 묶어 둔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며, 이제 가능하지도 않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에서, 경제적 삶의 목적은 오로지 경제성장이 아니며, 오히려 ‘지속가능하고 온전한 인간발전’이라고 한다.(128) ‘온전한 인간발전’이란 모든 사람이 행복과 복리의 기회를 누리며, 충만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전 인격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성장보다 고용이 훨씬 중요한 것은, 일이 소득의 원천이어서가 아니라 ‘통합적인 인간발전’에 필수적인 부분이어서다. 

기본소득 기획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사회적 권력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급진성에 있다. 시민으로서의 지위 자체가 그 사회의 부에 대한 정당한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권은 “투표할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부에 참여하는 권리이다.”(제임스 퍼거슨) 시민은 국회의원을 선출해 일정 부분 통치에 참여하는데, 왜 국가 공공의 부에는 접근하지 못하는가? 국가의 부는 노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통, 부담, 사회적 혁신 등이 모두 포함된 공동의 유산이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몫을 갖는다. 국가의 시민이 그 국가의 부의 실질적인 소유자들이다.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기술과 자본과 교육의 엄청난 혜택이 현재 극소수가 보유한 막대한 소득과 연관된다. 기본소득이 높아질수록 분배의 정의도 확장된다.

기본소득은 소득의 분배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직장 상사나 관료, 심지어 배우자의 독단과 월권 같은 권력의 위계에 대해서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임금이 낮거나 없더라도 자신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일이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예’라고 말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돌봄 노동자, 빈곤한 예술가, 인권 활동가 등.)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힘이 ‘사회적 역량’이다. 이 힘이 두루 퍼질수록 사회는 더욱 공정하게 될 뿐 아니라, 노동의 질을 체계적으로 향상시켜 결국 삶의 질도 높아지게 된다.

코로나19 이후의 삶이 더욱 가혹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람이 더 큰 위기와 위험에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의 복리는 총체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성장이라는 척도 하나에만 마취된 사회 안에 살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말해 주는 것은 이런 성장은 이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직면한 위기는 전면적이다.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려는 습속을 유지하며 이 위기에 대응할 수는 없다. 이 습속에 저항해서, 좋은 공동체에 필요한 원칙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전면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기본소득은 부유한 사람에게 돈을 강탈해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기여한 바 없는 과거의 혜택을 공정하게 재편성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계급의 차이를 완전하게 없애지는 못하지만(그 무엇이 없애겠는가?), 견고한 현상유지의 질서 아래서 희생당하고 배제받는 대다수의 사람은 이 기획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자유에의 열망이 변화의 폭발을 점화한 예는 역사에 무수하다. 지난달 부활 주일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코로나 위기와 싸우고 있는 시민, 민중운동 기구와 활동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을 ‘사회의 시인들’이라고 불렀다.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 해야 “연대감, 희망, 공동체 정신”뿐인 이들이 주변부의 사람들을 짖누르고 있는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붙잡고 놀라운 해결책들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시인’의 그리스어 어원은 ‘만드는 사람’이다.) 이 투쟁에 확고하게 함께 서 있겠다는 전언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종 스스로 덧붙인 위기 해결책은 ‘보편적 기본소득’이었다.

박상훈 신부(알렉산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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