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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4월 16-19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현재 위기는 인류공동 미래를 준비하는 기회”

교종, 4월19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4월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하느님 자비’의 성령 기념성당에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 선포 2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이날도 코로나19 방역으로 일반신자들의 참석 없이 TV와 SNS를 통해 중계되었다. 교종은 강론에서 우리들도 토마스 사도처럼 예수님의 자비를 보고 받아들여 주변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보여 주라고 요청했다. 

강론 내용.

지난 주일 우리들은 예수님 부활을 축하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 제자의 부활을 목격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지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충실하고 참을성 있는 ‘자비’로 시작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느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들어 올리시는 데 지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이 우리가 걸음마를 딛고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넘어질 것임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데리러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도록 우리가 스스로 실패를 극복하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긴 설교를 하는 대신 그분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 부활 후 처음 만난 토마스는 예수님 상처를 확인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다른 제자들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부활뿐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도 믿었습니다.

토마스처럼 상처 입은 인류도 예수님의 상처에 들어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 되시면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토마스는 아름답고 허약하지만 취약한 우리들이 주님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토마스의 생각과 같다면 예수님 ‘자비의 빛’이 우리와 세상을 통해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를 기다리셨듯이 자비의 빛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전염병보다 더 심각한 위기입니다. 우리들은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자비를 받고 자비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모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코로나 위기를 인류의 공동 미래를 준비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위기의 회복 노력은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단순하고 무해한 사랑은 토마스의 마음을 되살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하고 건설하는 길입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종이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전파한 성녀 파우스티나 시성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선포 20주년을 함께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은 20세기 폴란드 파우스티나 수녀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1993년 4월18일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복한 데 이어 2000년 4월30일 시성하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 자비의 주일로 선포했다. 그녀를 시성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부활 제2주일 직전인 2005년 4월2일 선종했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부활절 축하”

교종, 부활삼종기도 하느님 자비와 연대 강조

로마 가톨릭교회가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기념할 때 동방가톨릭과 정교회는 부활 대축일을 기념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부활 삼종기도 전 동방전례 교회와 신자들에게 축하와 축복을 보냈다. 

말씀 요지.

성 요한 바오로 2세 전임 교종께서 이곳 성령 교회를 ‘하느님의 자비’의 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분께서 축일을 제정하신 20주년에 이곳에서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생명과 역사의 폭풍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 특히 고난을 겪고 더 어려움을 겪고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단순히 신앙심이나 원조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동정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항상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우리에게 열려 있고 그분의 얼굴에서 흘러나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에 직면함에 따라 사람들이 연대정신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에서 영감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또 오늘은 정교회와 동방가톨릭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부활절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시련의 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오는 큰 선물과 희망을 느끼도록 기도드립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교종, 4월1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1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코로나 19 팬데믹 와중에서 특히 장애인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을 위해 봉헌했다. 교종은 강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담대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론 내용.

저는 어제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화 통역사로 봉사하는 자매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는 다양한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오순절 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사도 4,13-21)는 대제사장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대담함’에 놀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증거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코너에 밀어넣었습니다. 종교당국은 너무 놀랐기 때문에 그들의 눈앞에서 바로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치유했습니다. 그리스어 ‘parrhesia’는 종종 담대함, 솔직함 또는 용기로 번역됩니다. 이는 바로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나바르는 담대하게 히브리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설명하고 복음을 전했다고 전합니다. 자신감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교인이 담대함을 갖지 않으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히브 10,32-35)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원래의 대담성을 잃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과거 큰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감을 버리지 말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담함은 대제사장, 서기관 및 장로들의 단단하고 닫힌 타락한 마음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놀라서 무엇을 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전부터 믿고 있는 진리 대신, 외교(外敎)의 길, 타협의 길을 선택하기에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 완고했습니다. 사도들의 대담함 때문에 그들은 코너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물은 일조차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할 수 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해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도록 명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 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비겁하게 부인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도들의 변화는 매우 대단합니다. 겁쟁이 베드로에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마음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는 ‘성령의 은사’인 솔직함과 용기입니다. 담대함은 오순절 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자마자 용기 있게 증거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성서 말씀에 근거하여 일어났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세상에 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를 받습니다. 선교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데 담대하게 만드는 이 성령의 은사로 선교가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항상 용기 있게 행동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부당한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항상 신중하지만 담대합니다.

 

“주님과의 친숙함은 항상 공동체적으로”

교종, 4월17일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1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맞아 불안하고 걱정하는 임산부들을 위해 봉헌했다. 교종은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실 것을 기도했다. 

강론 요지.

오늘 복음말씀(요한 21,1-14)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발현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번에는 티베리아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동안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 다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5-6절 참조) 그들이 육지로 올라와 주님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을 때 어떤 제자들도 감히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이 구절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적적인 물고기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루카 복음 5장에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는 명령에 그대로 따르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6절)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은 놀라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쌓여진 주님께 대한 친밀감과 지식으로 겪은 여정이라는 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여정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걷고, 친숙하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친숙함은 항상 공동체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친밀하고 개인적이지만 공동체적입니다. 공동체가 없는 친밀감, 빵이 없는 친밀감, 교회가 없는 친숙함, 사람들이 없는 성찬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지식적인 친숙함입니다. 다시 말해, 나만의 친숙함은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주님께 대한 친숙함은 언제나 공동체적 친숙함이며 항상 빵과 함께, 성찬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현재 이 유행병과 함께 살고 있는 위험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육체적으로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지만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은 영적친교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성찬적으로 문제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정상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회입니다. 주님은 현재 이 상황을 허락하시지만 교회의 이상은 항상 사람들과 성찬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님과 친숙해야 하지만 결국은 속히 이 터널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교회와 성사, 하느님의 백성은 구체적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친숙한 가운데 성숙의 여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배우도록 합시다.

 

“희망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넘치기를”

교종, 4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코로나 전염병 사태를 맞아 수고하는 의료진 가운데 특히 약사들을 기억하며 봉헌했다. 그동안 코로나 사태와 관련된 다양한 그룹들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교종은 이날 약사라는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교종은 약사들은 사람들이 병에서 해방되도록 열심히 봉사해 왔다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말했다. 

강론 내용.

예수님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신 것에 사람들은 두려움과 놀라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여전히 우리의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시몬에게 나타나셔서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간증을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두려움이 높아져 귀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루카 24,37 참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셨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요한 6,19 참조) 그때의 경험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도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이러한 의심이 우리들 마음에도 떠오릅니까? 예수님은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의 두려움은 넘치는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너무 커서 그들조차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쁨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가장 큰 위로의 경험이었습니다. 행복하고 긍정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갇혀 있던 감방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놀라 자결하려던 간수 앞에 바오로 사도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사도행전 16,28) 외쳤을 때의 간수의 놀라움과 기쁨, 필리포스에게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충만해 세례를 청한 에티오피아 내시(사도행전 8장 참조)의 기쁨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바오도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5,13 참조)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없으면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쁨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바오로 6세 교종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과 복음 전파자들의 기쁨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사람들이 율법서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서의 소식을 들은 후 “야훼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다”며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기쁨을 증거할 힘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 열매를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새로운 삶’ 웹사이트에 기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4월17일 스페인어 정기간행물 ‘비다 누에바’(Vida Nueva, 새로운 삶) 웹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교종은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시켜 인류의 새로운 부활을 기대했다. 

내용 요약.

“기뻐하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분으로 이 여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모든 인류에게 기뻐하라고 권유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험도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확인한 제자들의 경험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고통과 불확실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살면서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마르 16,3)라고 묻고 있습니다. 묘지는 모든 희망을 묻어버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오늘날 노인들은 완전 격리를 강요당하고 더 이상 식탁에 음식을 넣을 수 없는 가족들, 지쳐서 압도당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방관만 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사건에도 자신들의 마비를 허용하지 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축복받은 여성들로서 예수님 부활에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먼저 도망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움에서 숨어 있는 동안 여자들은 자신의 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존재하고 동반‘함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도 그 여인들처럼 향유를 나르고, 공동책임의 ‘기름 부음’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형제자매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의사, 간호사, 슈퍼마켓 종업원, 청소원, 간병인, 물품을 운송하는 사람들, 공공안전관리, 자원봉사자, 사제, 여성 종교인, 조부모, 교육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누가 그 돌을 치워 줄까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발견한 기쁨은 예수님을 통해 그들이 주님을 위해 간직한 경계, 심지어 죽음과 그들의 가장 큰 절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부활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셨고 그들의 여정에서 그들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돌이 이미 굴러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깨뜨릴 수 있는 뉴스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많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또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열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귀는 부활의 새로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여행을 앞두고 우리를 마비시키는 돌을 제거하십니다. 아무도 이 희망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감염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제공하는 모든 봉사와 사랑의 삶은 다시 한번 이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름 부음이 들어올 수 있는 작은 틈만 있다면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복음 속의 여성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 ‘부활선언’에 의해 변화된 삶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하심으로써 희망을 되찾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새로워진 전망은 ‘새로운 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는 방법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도 혼자 내버려지지 않습니다. 제자들 공동체는 우리가 지금 발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경계와 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본주의 담론은 우리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거의 인식할 수없는 존재 앞에서 해체되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방해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권유합니다. ‘영의 호흡’은 우리 앞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해 주는 새로운 상상력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맥박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구체적인 역사의 순간 생성하시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 순간 필요한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복음과 성령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일하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영은 자신을 고정하거나 오래된 방법으로 닫히거나 착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은 우리는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요한계시록 21,5참조)고 하신 하느님의 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연대의 항체’로 극복되어야 합니다. ‘각각의 행동은 격리된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각 사람은 역사의 주인이며 전 세계 수백만에 영향을 미치는 악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고통에 등을 돌려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 전염병과 우리를 괴롭히는 다른 전염병에도 적용됩니다. 다른 전염병은 무엇입니까? 기아, 전쟁, 빈곤, 환경파괴, 무관심의 세계화 등입니다. 이러한 인류사회가 필요한 정의, 자선 및 연대의 항체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안적인 사랑의 문명을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희망의 문명’이며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피로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 문명은 매일 지속적으로 건설되어야하며, 이를 위해 약속된 형제자매 공동체들의 모든 사람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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