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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4월 20-22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봅시다”

교종, 4월22일 지구의 날 50주년 맞아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22일 수요 일반 교리교육 시간을 통해 ‘지구의 날’ 50주년을 맞은 이날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하자고 강조했다. 이날 교종의 가르침은 바티칸 도서관에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지구의 날’ 50주년을 기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 ‘공동주택’인 지구를 돌보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소중히 돌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자연계는 ‘창조의 복음’으로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자원이 아닙니다. 우리 이기심을 극복하고 지구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지구는 하느님의 집이며 이 거룩한 땅에 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태관찰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진정한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과 같이 서로 연대하여 행동함으로써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종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우리 모두 하나의 상호의존적 인간가족으로 직면한 위협에 공통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164항 참조) 부활절 쇄신의 시기에 우리는 공동의 가정과 모든 형제자매들, 특히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하느님,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104,30 참조) 오늘 저는 미디어를 통해 영어권의 충실한 신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 모두에게 하느님 아버지 사랑의 자비가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교종, 4월2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2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에 직면해 모든 국가가 연대해 맞서 줄 것과 특히 유럽의 견고한 연합을 호소했다. 또한 교종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 사랑의 빛과 어둠 속의 삶 사이에서 확실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우리 자신들과 국가 간 연대가 매우 절실한 시기에 저는 오늘 특히 유럽을 위해 기도합니다. 유럽은 유럽연합 창시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으로 되돌아가야 진정한 연합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3,16-21)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구속에 관한 풍부한 신학적 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 사랑의 계시인 빛과 어둠의 실존적 선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십니다. 어느 성인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광기처럼 보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가장 높은 표현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교 지혜를 포함합니다. 성령은 십자가 안에 모든 과학, 모든 하느님의 사랑, 모든 그리스도교의 지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인간의 추론은 어느 한계까지만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추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스캔들과 광기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들은 어둠에 익숙해져서 빛 가운데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이 눈을 멀게 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 박쥐와 같습니다. 그들은 밤에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빛을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빛은 얼굴을 때리고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부패의 블라인드입니다. 빛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을 대면하기는 어렵지만 영혼의 눈은 빛을 모르면 나빠집니다. 많은 인간 스캔들과 부패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부패한 사람들은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빛과 어둠에서 어디에서 걷습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박쥐가 되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빛이 우리 삶에 빛나도록 기도드립니다.

 

“침묵 속에 듣는 법을 배우자“

교종, 4월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코로나 사태와 함께 특히 이날 우천으로 로마시내가 더욱 조용해진 침묵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능력과 지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강론 내용.

오늘 같은 날씨는 너무 조용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침묵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에서 조금 새로운 오늘날의 침묵에서 우리들이 들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성령께서 가르치시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사도 4,32-37)은 첫 번째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32절)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공동이었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위에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성령의 힘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성령을 취할 수는 없지만 그분을 받아들여 위에서 변화하도록 만들 수는 있습니다. 위에서 태어난 예는 바로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는 우리가 순수하다면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한 모범이며, 이상적인 표징입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 조화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에 조화를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에는 많은 분열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초대 공동체에 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돈입니다. 교회 역사상 교리적 차이를 겪고 있는 원인에는 돈이 종종 개입되어 있습니다. 돈은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빈곤은 공동체의 어머니이며, 빈곤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벽’입니다. 돈 나누기와 돈 사랑은 공동체를 나누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가족들도 돈으로 갈라집니다. 지역사회를 분열시키고 나누는 두 번째 요인은 허영입니다. 허영은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성대한 잔치는 얼마나 자주 허영심의 모범이 됩니까? 누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누가 멋진 일을 하는가, 이러한 허영심 때문에 공작이 생겨나고 분열이 생깁니다. 공동체 분열의 세 번째 요인은 ‘가십’ 즉 ‘뒷담화’입니다. 마귀가 다른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넣어주는 속삭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항상 세속적인 돈과 허영심과 가십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총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공동체를 변화시켜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화합과 조화가 항상 전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정치인들은 국가 전체의 선익을 위해야”

교종, 4월20일 아침미사 정치인들을 위해 봉헌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2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모든 정치인을 위해 봉헌했다. 교종은 미사를 시작하면서 “정치적 소명을 가진 남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정치는 자선의 높은 형태입니다. 현재의 코로나19 위기 동안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국가 전체의 선익을 함께 모색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복음(요한 3,1-8)에는 유대인 지도자이자 의로운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행동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2절) 니고데모의 고백은 “그러므로”, “다음에 무엇을 하기” 전에 중단됩니다. 이것은 그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 응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을 문학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4절)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고 설명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8절)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에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성령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성령 안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계명을 이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거기서 멈추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이 당신 안으로 들어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다음에 무엇을’ 하기 전에 멈추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어디로 갈지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유롭게 인도하시도록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어려움과 닫힌 문에 직면했을 때 기도로 주님에게 갔다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령의 문을 열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사도 4,23-31)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은 후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기독교 공동체가 조금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기도로 하느님께 향했고 효과적으로 ‘제 2의 오순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대담해져서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태어나 계명을 넘어서고 종교적 관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 모르더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항상 성령께 마음이 열려 있도록 도와주시고 봉사의 삶에서 우리 모두를 주님께 인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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