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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를 만드는 신앙[신학과 성찰 - 유승태]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11-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공동번역 성서", 루카 17,20-21)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공동번역 성서", 마르 6,40-42)

‘사이’가 사라진 세계

‘저신뢰(低信賴) 사회’는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 중 하나다.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일까? 저신뢰 사회라는 표현에서 ‘사회’는 ‘저신뢰’라는 표현의 주어가 될 수도 있고, 목적어도 될 수 있다. 사회가 주어일 때는 ‘시민사회’에 대비되는 ‘국가(와 공공영역 전체)’와 ‘시장’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한 시장조사기관이 2014년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사회적 신뢰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정부·시장·언론 신뢰도는 매우 낮다.1) ‘상품 구매시 해당 가격이 믿을 만한 가격인지 의심한다’에 동의한 응답자는 48퍼센트였으며, 뉴스 출처가 정부나 언론일 경우 해당 뉴스가 사실인지 의심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각각 47.7퍼센트, 41.1퍼센트였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도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는 11.6퍼센트였으며, ‘내 자녀들에게 모르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라고 답한 사람은 54.9퍼센트, ‘내 가족(들)을 신뢰한다’고 답한 사람은 83.3퍼센트로 나타났다. 아마도 공공영역과 시장영역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인식이 강해진 걸로 보인다. 결국 사회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신뢰 사회는 어떻게 우리 일상에서 체현될까?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만난 한 어르신 이야기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당하고 그이는 극도의 불신을 안고 살게 됐다. 우리 단체에 처음 왔을 때 그 어르신은 국가나 시에서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무료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소 어리둥절해 했다. 그이는 다른 어르신들보다 더 오랫동안 우리를 ‘다단계’나 ‘종교단체’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1년여 만나면서 꽤 신뢰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그분과 관계가 한순간에 틀어진 사건이 있다. 우리 단체는 올해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어르신이 바우처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소득증명을 위해 가족과 연락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녀들에게 과거 사기당했던 경험 때문에 눈총을 받아야 했다. “거기(마을부엌)를 어떻게 믿고 카드를 발급 받나?” 자녀들은 물었지만, 어르신은 그 말이 “또 엉뚱한 사람 믿고 사기당하려고 그러나?”로 들렸을 것이다. 결국 그 어르신은 바우처 사업만이 아니라, 그간 잘 참여하던 마을부엌 프로그램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웃에게 배신당한 경험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가 ‘가족 외에는 다 도둑’이라는 신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이처럼 저신뢰 사회라는 말에는,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세 영역이 한국이라는 시공간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반영돼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한다는 세 영역이 마치 사회 자체의 구성을 불가능하게 하고 개인을 ‘자연 상태’의 공포로 몰아넣는 형국이다. 이런 사회에서 타인과 건강한 ‘사이’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저신뢰의 불평등한 효과

그런데 이 공포는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소유하거나 동원할 자원이 적고, 자신에게 안전한 영역을 구축하는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이 공포는 더 크고 강하게 느껴진다.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거대한 삶의 위기와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위기에 대한 대응력, 위기를 겪고 난 후의 회복력은 사실 주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이 있는가, 얼마나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에 좌우된다.

사회적 관계가 정신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고용불안이나 미취업 상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보다 불안감을 더 쉽게 해소하며 대응 능력이 높다. 믿을 만한 사회적 관계 또는 결속이 있다고 인지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건강하거나 사회적 성취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저신뢰 사회가 주는 불안감은 더 크게 느껴진다. 믿을 만한(영향력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큰 노력(투자)과 인내가 필요한데, 이러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마련할 능력이 이들에게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제도나 타인에 대한 불신이 높을수록 거래비용(불안 해소를 위한 비용)이 증가하는데, 이를 감당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는 경제적 약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저신뢰 사회란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극대화된 사회이며, 개인의 삶과 생명에 대한 배려가 공공적 차원에서 합의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희박해진 사회다. 따라서 소득이나 자산 등 물질적 자원이 부족한 이들뿐만 아니라, 삶과 생명을 위협받는 이들과 그 현실을 공공의 의제로 전환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빼앗긴) 모든 사람이 사회적 약자다. 그리고 물질적 자원과 담론적 자원이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것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지는 경기와 같으며, ‘저신뢰’의 부정적 효과는 경사로를 따라 아래를 향해 쏟아져 온다.

때문에 ‘저신뢰 사회’는 단순히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믿을 만한 관계를 만들 수 없는 이들이 구조적으로 자신의 삶과 생명을 더 억압받는 사회다. 이처럼 ‘신뢰’라는 용어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 관계만이 아니라, 그 관계를 떠받치는 공적 구조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뢰 또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런 사회를 개혁 또는 개선하는 개념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오병이어의 기적', 제임스 티소.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

오늘의 루카복음서 본문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니고, ‘여기’나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전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포함해 ‘우리 사이’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사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현장을 말할 때는 자신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리문답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 등으로 정의된다.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록한 마르코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는 자신을 따라온 가난한 5000명의 사람을 50명 또는 100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고 빵을 나눠 주셨다. 떼를 지어 앉게 했다는 것은 모두 줄 맞춰 앉아서 자신(예수)을 보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둘러앉게 하셨다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마르코 복음서의 시좌(視座)에서 예수는 중심에 있지 않다. 사실 중심이란 없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왔다는 우연한 계기, 배고픔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허기를 달랠 빵과 물고기가 주어졌다는 사실 등의 우연적 요소가 예수를 매개로 엮여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따라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다”는 말의 의미는 ‘답’이라기보다 ‘질문’의 형태, 또는 비어 있는 기표에 가깝다. 그런데 그 비어 있는 질문은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모이게 한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관계를 통해 하느님 나라 운동이 실천된다. 빈 기표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네트워크)이 바로 교회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정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는 비어 있고, 그 투명하게 비어 있는 ‘틈’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신앙이란 우리 사이에 계신 하느님을 보는 것, 정확히는 우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매개하신 하느님을 통해 상대(사람과 자연)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상태 또는 그렇게 보는 행위다.

공감과 연대는 어떻게 저항이 되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메시아)로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를 재구성함으로써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질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1세대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메시아 역할’을 하는 이가 누구인가 물었다. 그는 “강도를 만나 고통받는 그 사람이 바로 메시아(예수)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구원하는 자(예수)-구원받는 자(인간)’의 구도를 뒤바꾸었다.

우리가 민중에게서 메시아 역을 보고 있는 것은 …… 예수의 고난과 그 경험을 통해서 새 인간성이 동틀 가능성을 약속받았다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픔의 경험을 통해서 눈이 밝아지고, 거기에 응답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은 ‘새 인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민중이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민중이 겪고 있는 고난 자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면 그게 사람 되는 길이고, 그게 바로 구원의 길인 것이죠. 이렇게 이해한다면 고난받은 민중이 메시아이고, 그래서 민중은 새 시대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2)

서남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재해석해 ‘메시아(구원자)’의 정치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 수난의 의미가 ‘개개인의 구속자’나 ‘천당 안내자’라는 뜻이 아니라 ‘신음소리를 내는 역할’에 있다고 보고, 이 비유에서 ‘메시아(예수) 역할’을 하는 이는 율법학자, 레위 사람,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사마리아인은 ‘죽겠다는 호소’, ‘신음소리’를 듣고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새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죽음에서 구출한) 행위가 결국 사마리아인이 죽임의 체제의 부속품으로 머무는 것을 중단하게 했다. 서남동의 해석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때문에 (서남동의 민중신학이 말하는) 구원이란 개인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죽임의 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다. 자연히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의미도, 구원의 메시지를 설파하거나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해 타자(사람과 자연)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저신뢰 사회는 강도 만난 사람을 모른 체하고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사회다. 그들은 사회적 통념과 체면에 사로잡혀 고통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이런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고립돼 있고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직접적 경험에 의한 것이든, 미디어에 의해 갖게 된 통념이든) 타인과 공적 세계에 대한 불신이 그이를 더욱 고립되게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원을 가진 자는 폐쇄적인 사적 관계망을 강화하려 하고, 자원을 갖지 못한 자는 자기 안에 갇혀 자신을 좀먹는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하느님 나라 운동은 개인을 고립시키고 소비자로만 머물게 하는 이 사회의 폭력을 고발하고 그 사회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있음을 증언해야 한다. 증언이란 고통받는 이의 곁에 서서 그이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것이다. 즉 고통받는 사람을 저 멀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품을 내어 주고 곁에 서는 것, 그들과 ‘사이’를 만들고 연대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증언과 신앙일 것이다.

1)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trendmonitor.co.kr), '2014 사회적 신뢰 관련 인식 조사' 참고.

2)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180쪽.

유승태
한백교회 전도사.
사회적협동조합 꽃피는신뢰 이사장.
사회적 경제 운동과 작은 교회 운동이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중요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연구와 현장 실천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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