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안정현]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칸 영화제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넘어 전 세계인이 공감할 관심사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헌정해 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약자와 소외계층의 안전망이 되어야 할 사회복지 시스템이 행정 편의주의로 전락한 현실을 풍자했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는 동성애를 다루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2004)은 911테러 후 미국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가 이끈 악의 축과의 전쟁 이면을 보여 주었다. 좀 더 오래전 수상작인 '언더그라운드'(1995)는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일어난 발칸반도의 내전과 슬픈 역사를 그렸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전 세계인이 공감할 시대의 문제를 다뤘다.

'기생충', 봉준호, 2019. (포스터 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양극화

영화 '기생충'이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환기다. 영화는 상위 0.1퍼센트쯤에 속하는 한 가족과 하위 0.1퍼센트쯤에 해당할 것 같은 다른 한 가족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극단적 불평등과 공존을 묘사했다. 깔끔히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 문 앞에서 다시 계단을 지나야 드러나는 높은 동네의 고급 주택에 사는 박동익(이선균 분) 가족, 언덕길과 수없이 많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서야 다다르는 아래 동네 반지하 연립주택, 그것도 모자라 화장실보다도 아래에 사는 기택네(송강호 분) 가족. 사실 주거공간이 화장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 눈에 띄는 특이한 설정이었는데, (같이 영화 보러 간 프랑스인 지인들은 저런 집이 한국에 진짜로 있는지 궁금해 했다) 하수 배관보다도 아래 위치한, 그야말로 도시의 밑바닥에서 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설정이 아닌가 싶었다.

양극화는 한국에서 1997년 IMF 이후 쉴 새 없이 악화되었지만, 단지 한국적 현상만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지난 30여 년간 전 세계 공통적으로 경험한 추세다. “한국을 담은 영화지만 동시에 전 지구적으로도 긴급하고 우리 모두의 삶과 연관이 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평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심사위원장의 심사평에서 드러나듯, 양극화는 바로 전 세계적인 문제다.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부의 불평등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언급하면서, 양극화의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중산층 해체

양극화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첫째로 중산층 해체에서 찾을 수 있다. 중산층과 그들의 생활 공간을 스크린에서 철저히 배제한 '기생충'은 극단의 두 가족의 차이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중산층이 붕괴되고 최부유층과 최극빈층만이 존재하는 양극화 사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중산층 해체의 이면에는, 계층이동 사다리 고장과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 있다. 한국에서 더는 평등하게 제공되는 교육의 기회를 통해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집안이 가난해도 공교육을 통해 명문대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중산층, 고소득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점점 막히고 있다. 첫 관문인 명문대 재학생들의 가정환경 통계만 봐도 금세 드러난다. 2017년 기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재학생 중 70퍼센트는 국가장학금 신청이 필요치 않은 넉넉한 집안 출신이고, 기초생활수급자 및 소득 하위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은 전체 학생의 10퍼센트에 불과하다.1) 한 연구에서는 서울 강남구 학생들의 서울대 합격률이 강북구의 20배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2) 강남구 주거비용이 강북구보다 높음을 고려할 때, 결국 소득격차가 교육격차로 그대로 이어짐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택(송강호)네 가족 모두 개인적으론 다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들은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명문대에 간 친구가 하던 과외를 아무 문제 없이 이어받을 수 있는 능력이 되고, 딸은 개인 미술과외를 할 재능이 있고, 엄마는 한때 각종 대회에서 입상한 운동선수였다. 아들딸들은 능력과 소질에도 불구하고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명문대에 들어갈 스펙을 만들지 못했거나, 정시 수능에 좋은 점수를 받도록 남들만큼 사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산층 해체의 또 다른 원인은, 중산층 진입을 위한 소득을 주는 양질의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방향으로 산업구조가 개편되었다는 점이다.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은 세계적 추세다. 지난 30년간 생산직 일자리들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일부 고숙련 노동을 제외하고는 자동화로 로봇에 대체되거나, 노동력이 저렴한 개발도상국으로 이전되었다. 한국에서 지난 1991년 이후 제조업에서만 1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생산직 일자리 감소를 상쇄해 왔던 사무직 일자리 또한 정보통신기술 발달과 함께 위협받는다. 내가 사는 프랑스에서도 그 예로 비서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존재했던 안정된 소득을 주던 직종들은 비정규직화, 파견 노동의 형태로 외주화되었고, 이들의 소득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반토막 났다. 인공지능, 블록체인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가까운 미래에는 회계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 직종의 많은 업무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 한다.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일부 고소득 전문 직종, 예를 들어 IT 엔지니어, 일부 금융 직종 종사자, 바이오산업 종사자 등등이 되기 위해 더 많은 교육을 받던가, (이를 위해서는 가족이 경제적 능력이 있던가, 교육을 위해 빚을 져야만 한다) 아니면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우울한 미래가 기다린다.

상업고등학교만 나와도 은행에 정규직으로 취직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불과 30년 전 일이다. 오늘날엔 4년제 대학도 모자라 석사학위를 요구하는 곳이 많아졌다. 저소득층의 명문대 입학은 점점 어려워지고, 들어가서도 기나긴 교육 기간을 버틸 경제력을 갖고 있거나, 학자금 대출 상환의 큰 짐을 지고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기생충'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초고소득층의 등장

중산층 붕괴와 함께 병행된 지난 30년간의 변화는 초고소득층의 소득 증가와 저소득층 소득의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나라는 미국이다. 1979년에서 2015년 사이 미국의 1퍼센트 최고 소득자들은 하위 20퍼센트 소득자들보다 7배나 더 많은 소득 증가를 경험했다. 그 결과로 2017년 기준, 미국 상위 0.1퍼센트의 최고 소득자들은 하위 90퍼센트 소득자들 평균보다 소득이 188배나 더 많다.3) 이러한 소득의 불균형 성장은 부의 불균형을 가속화했다. 2018년 미국 3대 갑부, 즉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워런 버핏(Warren Buffett), 아마존 최고 경영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 3인의 재산의 합이 미국 하위 50퍼센트가 소유한 재산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다.

이러한 기형적인 부의 불평등을 가져온 소득 격차에는 지난 30년간 눈부시게 성장한 기업 최고 경영자들의 초고액 연봉이 큰 기여를 했다. 미국 최고 경영자들의 연봉은 2017년 기준으로 일반 사원 평균의 312배에 달했다. 1960년엔 20배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미연방정부가 정하는 최저임금은 1달러에서 7.25달러로 겨우 7배 올랐다. 그나마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임금으로는 오히려 감소했다.

왜 최고 경영자들의 보수만 눈에 띄게 오른 걸까? 그들이 하는 일이 더 복잡해진 걸까? 우연히도 '기생충'에서 최고소득층 가정의 가장 동익(이선균 분)은 잘나가는 IT 기업의 최고 경영자다. 경영자의 많은 보수를 옹호하는 이들은, CEO의 기여에 따른 정당한 과실분배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복잡하고 글로벌한 경쟁 속에서 최고 경영자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이들의 결정 하나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CEO를 누가 맡느냐에 따라 주가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이들에게 좋은 예다. 따라서 최고 경영자의 보수는 절대 과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고 경영자의 역할이 기업 평균 사원들의 몇백 배 혹은 몇십 배에 이르는 것일까? 게다가 최고 경영자는 혼자 분석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많은 보좌진의 도움과 조언을 받는다. 최고 경영자의 보수 증가와 더불어 최고 경영자 보좌진도 그 숫자가 현저히 늘었다. 오늘날 많은 CEO들이 자사 주가와 연동하여 보수를 정하는 룰에 견주어 봐도 최고 경영자 연봉의 초고속 증가는 지나친 면이 있다. 기업의 가치가 주가로 설명되는가 하는 논쟁을 잠시 접어 두더라도 평균적으로 최고 경영자 보수는 주가 상승률보다도 높았다. 1978년부터 2017년 사이 미국의 대표 주가지수인 S&P지수가 6.4배 오르는 동안 최고 경영자 보수는 평균 10배 이상 올랐다.

최고 경영자의 보수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정당한 보수가 아니라는 반례는 또 있다.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굵직한 미국의 은행과 보험사들이 부도를 내거나 부도 위기에서 정부의 구제 금융으로 회생했다. 당시 CEO들은 해임되었지만, 수백만 달러의 상여금을 받고 유유자적하게 떠났다. 대표적 미국 보험사인 AIG의 CEO 마틴 설리번(Martin Sullivan)은 2008년 990억 달러의 손실을 내고, 주가를 70달러에서 1.25달러로 98퍼센트를 말아먹고서도, 4700만 달러의 상여금을 챙기고 떠났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지난 2013년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감옥에 수감된 기간에도 최고 경영자 보수 명목으로 300억 원 이상의 보수를 챙겼다. 최고 경영자 보수가 기여의 대가가 아니라는 게 자명하게 드러나는 예다.

한국도 미국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고 경영자의 고액연봉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개혁연구소의 2019년 한 보고서에 따르면 재벌기업 최고 경영자와 직원 평균 보수는 2017년에 21배 차이가 났고, 재벌 총수 일가로 최고 경영자를 겸직하는 경우엔 34.5배에 달했다. 한국에선 등기이사가 아닌 총수 일가 이사들이 존재하고, 이들은 연봉 공시 의무가 없는 점을 참작할 때 이 격차는 실제로 더 크리라 추론할 수 있다. 2014-2017년 한국 최고 경영자 평균 연봉은 17억 9000만 원이었다. 같은 기간 한국 최저임금 시급은 평균 5823원. 이를 연봉으로 환산하여 비교하면 최고 경영자 평균 연봉은 최저임금의 122.5배에 이른다.(주당 40시간 근무와 8시간 유급휴가의 현행 최저임금 월급 산정방식을 적용한 필자의 계산이다)

이러한 고액연봉이 한국에서 소득 불평등에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한국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에 7퍼센트대였지만, IMF를 거치며 꾸준히 증가해서 2016년엔 12.2퍼센트에 이르렀다.

공유경제 혹은 긱(Gig) 이코노미, 위베리자시옹(Uberisation)

양극화와 양질의 일자리 파괴,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로 대표되는 우울한 21세기를 파고드는 새로운 현상 중 하나가 비정규직보다 못한 독립 개인사업자의 등장이다. 한국에선 각종 배달 앱을 통해 일하는 배달업 종사자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이전엔 식당의 배달원이었다가 정보통신기술 발달의 덕택(?)으로 개인사업자로 전환된 분들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우버(Uber)다. 프랑스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변화를 통틀어 ‘위베리자시옹’(우버화, 프랑스에서는 우버를 위버라 부른다)으로 지칭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기업의 상징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초기 우버의 캐치프레이즈는 놀고 있는 차와 차주를 필요한 사람과 연결해 주는 앱 기반 서비스였다. 공유를 통해 재화의 활용률을 높이고, 자동차를 가진 여가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는 부업이 되고, 잠시 운송수단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택시보다 저렴한 대중교통으로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진 집이나 빈방을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에어비앤비(Airbnb), 남는 시간에 배달 일로 부수입 올리게 해 주는 각종 배달앱 서비스들이 이에 속한다. ‘공유경제’라는 용어는 이 추세의 가장 낙관적인 버전이다.

그러나 우버 택시 일을 하는 사람, 배달앱 서비스 종사원 중 과연 몇 퍼센트나 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이 일을 할까? 미국에서는 대부분 실직자들이 다음 직업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이 일을 하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다. 오늘날 미국의 역대 최저 실업률 이면에는 우버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독립사업자의 증가가 있고, 이는 미국의 임금 정체에 영향을 준다.

‘공유경제’라는 용어보다, ‘긱 이코노미’라는 용어가 우울한 현실을 더 잘 보여 준다. ‘긱 이코노미’는 1920년대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연주자를 즉석에서 섭외해서 고용하는 긱(Gig, 임시 일자리)에서 유래했다. 그야말로 ‘불안정한 일자리 경제’라는 뜻이다. 배달 앱을 통해 배달원을 구하는 식당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고용을 하나 줄여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겠으나, 경제 전체로 보면, 정보기술의 발달은 결국 불안정하지만 그나마 고용관계 안에 있던 배달원을, 사회적으로 노동자로서 어떤 지위도 보장받지 못하는 독립사업자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론 비정규직보다 못한 형태의 노동자를 양산하는 사회적 후퇴다. 이들은 독립사업자로 4대 보험도 없고 최저임금도 없다. 식당 배달원은 식당에서 오토바이라도 제공받았다. 이제 독립사업자가 된 배달기사는 자기 돈으로 운송수단을 구매해야 하고, 연료비와 수리비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얼마 전 일이다. 한적한 토요일 오후,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공화국 광장)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레퓌블리크 광장은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장소로, 집회 때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광장에서 출발해서 이곳에서 거리시위를 마무리한다. 그날 광장에는 자전거와 함께한 긴 행렬이 있었다. 음식 배달 주문을 기다리는 배달기사들의 행렬이었다(광장 건너편엔 다양한 식당들이 운집해 있다). 한 손엔 핸드폰을 주시하면서 배달앱 서비스 로고가 찍힌 가방을 메고 있어 멀리서도 배달기사들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이 어릴 때 보았던 사진 한 장과 오버랩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일감을 얻기 위해 늘어선 날품팔이 노동자들의 긴 행렬을 찍은 사진이었다. 2019년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가진 프랑스 수도 한복판, 민주주의의 상징인 장소에서 전쟁 후 폐허였던 한국의 70여 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긱 이코노미’의 현주소다.

최근 정보통신기술발달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노동자들마저 법의 보호 밖으로 내몰고 몇몇 IT 개발자와 최고 경영자만이 그 성과를 독식하는 현실이 있다. 게다가 스마트폰 앱에 기반한 플랫폼은 서비스 수요자와 공급자가 일정하게 확보되어 시장을 선점하면, 그 지배력을 이용해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다. 이러한 이윤의 원천이 바람직한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사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된 이 새로운 추세는 양극화를 해결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문제의식이 아예 없다. 어떤 이들은 공유경제 덕분에 새로운 형태의 직종들이 생겨나 또 다른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존에 존재했던 고용 노동자 직종이 더욱 파편화된 형태의 자영업종으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로 ‘긱 이코노미’의 일반화는 양극화를 가속화한다.

게다가 기존의 노사관계 틀 안에서 만들어진 고용 안정화 정책은 소득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정규직화, 4대 보험, 최저임금 등 기존의 노동자 보호를 위한 정책 패러다임은 새로이 증가하는 이들 저소득 개인 사업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생충'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기본소득

정보기술 혁명과 함께 도래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기존의 사회복지제도로 보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최근 대안적 사회복지제도의 한 가지로 기본소득이 심심치 않게 회자된다. 소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수준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기본취지다. 같은 공공 서비스를 받지만 개인의 소득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 분담금을 차등 책정하거나(예를 들면 의료보험), 개인의 소득 정도에 따라 공적 부조를 지급하는 것(저소득층을 위한 각종 보조금이나 기초생활 수급자들이 받는 생계급여 등)과는 발상 자체가 다른 복지제도다.

흥미롭게도 정보기술혁명의 혜택을 톡톡히 받는 몇몇 최대 IT 혹은 금융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이에 찬성 견해를 내고 있다.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와 상업용 우주선 회사 스페이스 X의 일론 머스크(Elon Musk)뿐만 아니라, 미국 최대 은행 중 하나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 또한 기본소득에 우호적 견해를 밝혔다. 기업가들에게도 정보기술혁명으로 가속화되는 자본주의의 양극화가 매우 커다란 위협이라는 우려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극단의 양극화 사회에서 자신들이 만든 물건과 서비스를 사줄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그러나 ‘긱 이코노미’가 일반화되고, 양극화의 해결책으로 기본소득이 일반화된 미래 사회를 상상해 보자. 기업에서 창출된 이윤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대다수는 기본소득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 과연 바람직한 사회일까? 노동한 대가로 급여를 받는 것은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노동이 사회에 유익했음을 인정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이 후자를 결여하고 있다. 누구나 절대빈곤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유익함을 인정받을 수 없는, 아니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사회, 이러한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일까?

기업에서 창출한 이윤이 생산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각자 기여한 만큼 분배될 수 있는 방식의 대안은 없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1930년대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결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 같은 발상이었다. 노동 생산성 증대만큼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으로 구매력을 갖춘 소비층을 양산함으로써 과잉생산과 수요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임금인상은 노동자들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기업가들 또한 이 생각에 동의했다.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Henry Ford)는 작업 공정을 표준화하고 컨베이어벨트로 연결하여 작업장에서 노동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노동강도를 높이는 대신 높아진 효율성만큼 다른 공장보다 2-3배의 임금을 지급했다. 고임금은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차를 사 줄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를 창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런 시스템은 다른 기업에도 퍼져 곧 보편적인 기업의 운영방식이 되었고, 2차 대전 후 1970년대 초까지 30년간 자본주의 황금기, 대량생산 대량소비사회를 이끈 기초가 되었다. 포드의 이름을 따라 이 시기 자본주의 시스템을 포드주의라 부르는 이유다. 이 기간에 자본주의 중심인 미국에서 임금인상률은 거의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비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노동생산성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거의 제자리에 머물렀다. 무상 소득을 주기보다는 기업의 가치 생산에 참여한 이들에게 그에 걸맞게 보상함으로써 서로 도움(win-win)이 되는 체제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결국 자본주의 체제도 위협하는 불평등의 심화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안정에도 도움이 안 된다. 여러 논리를 들지 않더라도 단순히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 100년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극심한 경제위기는 양극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1929년 대공황 직전과 21세기 초입에 발생한 2007-2009년 금융위기 직전, 미국 상위 0.1퍼센트 소득자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퍼센트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1차 석유파동에 이르는 이른바 자본주의 황금기엔 이들의 소득 비중이 지난 100년간 가장 낮은 수준인 3퍼센트대를 유지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 분)는 반지하를 벗어나고 지하벙커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장기 계획을 세운다.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대에 진학하고, 돈 많이 벌어 동익의 집을 사겠다는....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사다리 복원을 소박하게 바라지만, 영화는 여전히 반지하 방 기우의 얼굴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가 양극화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논의들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 이도경, 오주환, 'SKY엔 ‘금수저’들이 산다……재학생 10명 중 7명 부유층', <국민일보>, 2017.2.9.

2) 김세직 외, "학생 잠재력인가? 부모 경제력인가?", '경제논집' 54권 2호(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2015), 356-383쪽.

3) Emmanuel Saez, 'Striking it Richer: The Evolution of Top Incomes in the United States'(2019)(https://eml.berkeley.edu/~saez/saez-UStopincomes-2017.pdf).

 

안정현

프랑스 네오마(NEOMA)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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