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생명이 없는 곳에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교종,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이날 전례 복음구절에 나타난 부활에 대해 설명했다. 교종은 지상의 차원은 유일하지 않으며 저 세상의 차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사랑하시며, 참된 관계와 신뢰가 충실히 결속하는 데서 생명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루카 20,27-38)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 몇 사람에게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함정 있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도발했습니다. 자식 없이 죽어간 형제들을 차례로 일곱 남편으로 맞았던 여인은 부활 때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세상에서 부활한 이들이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고 응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을, 우리도 마찬가지로 지금 살고 있는 이 지상적 차원을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충분히 드러내고, 또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다른 차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죽음을 넘어선 삶에 대한 예수님의 단순하고도 명확한 말씀을 듣는 것은 큰 위안과 희망을 안겨 줍니다. 특히 우주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 지혜가 매우 빈약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위안과 희망이 많이 필요합니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이 같은 명쾌한 확신은 전적으로 생명의 하느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사두가이의 질문 이면에는 심오한 질문이 감춰져 있습니다. 일곱 남편의 과부인 여인이 누구 아내가 될 것인지뿐 아니라, 그녀의 삶이 누구 소유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모든 시대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의혹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지상의 순례가 끝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나 허무에 속하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은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우리 이름과 연결시키실 정도로 우리를 염려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7-38) 관계, 친교, 형제애가 있는 곳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참된 관계와 충실한 결속 위에 성립될 때 생명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만 속하고 무인도처럼 살아간다고 주장하는 곳엔 생명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죽음이 득세합니다. 이기주의입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내 마음속에 죽음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백하는 내용으로 매일을 살아가도록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도와주시길 빕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즉 우리는 저 세상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종, 남수단 순방 의지 피력

프란치스코 교종은 주일 삼종기도 후 내년 아프리카 남수단 순방 의지를 밝히면서 또한 볼리비아를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아울러 교종은 새로운 성인과 복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교종은 “남수단 국민들은 최근 몇 년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미래, 특히 분쟁의 완전한 종결과 항구적 평화를 절실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책임자들에게 남수단 선익을 위한 평화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폭넓은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 갈 것을 촉구합니다.”라고 말하고 국제사회가 국가적 화해를 이루기 위한 길을 걸어가는 남수단과 동행해 달라고 당부했다. 

2011년 수단에서 독립한 남수단에는 2013년 내전이 발발했다. 살바 키르 남수단 대통령은 쿠데타 배후로 리크 마차르 부통령을 지목했다. 이 내전으로 최소 40만 명이 목숨을 잃고 400만 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다. 교종은 남수단과 합께 선거결과에 따른 혼란에 휩싸인 볼리비아를 위한 기도를 당부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모든 볼리비아인들, 특히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진 사람들에게 “지금 이뤄지고 있는 선거결과를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평화와 평온의 분위기 속에서 건설적이며 조건 없는 기다림을 견디기를 바랍니다. 평화 속에서 말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와 함께 교종은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11월9일 시복된 ‘성체와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선교수녀회’ 창립자 복녀 마리아 에밀리아 이 자야즈 모범을 바라보라고 초대했다. 또 교종은 이날 포르투갈에서 바르톨로메오 페르난데스(수도명: 순교자들의 바르톨로메오)가 시성된 것에 대한 감사미사도 언급했다. 이번에 복자품에 오른 마리아 에밀리아 리켈메 이 자야즈는 성체조배에 열심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번에 복자에서 성인품에 오른 바르톨로메오 페르난데스는 훌륭히 복음을 전하는 사목자였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못하시는 인간 마음은 없다”

교종,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미사 강론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9일 로마 주교좌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축일 미사를 집전했다. 교종은 로마 시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미사 강론을 통해 하느님 현존을 포착하며 영적 가벼움으로 복음화의 새로운 시기를 살아가라고 권고했다. 이날 교종은 사목 협력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강론 요지.

오늘 미사 화답송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시편 46(45),5)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도성에서 흘러나오는 강물과 같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과 희망의 말씀을 가져와 마음의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급류처럼 불모지를 약효의 힘으로 항상 푸르고, 잎과 열매가 있는 나무의 정원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또 그들은 말씀의 보물을 나누고 공동선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기쁨의 선포자들’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력의 비결은 하느님입니다. 

주님께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을 보시고 또 당신께 부르짖는 불쌍한 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데 준비된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각 지역교회의 모교회인 라테라노 대성당이 복음화의 새로운 시기를 위해 열정이 충만한 자녀들의 순명과 용기를 다시금 보면서 위로를 누리길 빕니다. 타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겸손과 고마움과 가난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힘든 노력이 아니라 영적 가벼움으로 살아가길 초대합니다. 성과에 대한 염려로 사로잡히기보다 도시 안에서 하느님 현존과 활동을 포착하기 위한 감각을 넓혀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랑에서 오는 관상입니다.

모든 사목자들은 공동체를 세속화와 나쁜 타협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모든 영적 건물의 유일한 토대인 복음에서 우리를 떨어뜨리려는 ‘탐욕스런 늑대’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해야 합니다. 바오로처럼 여러분도 지혜로운 건축가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공과 즉각적 보상을 넘어 오직 하느님 말씀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목자들은 처음부터 항상 사람들 가까이 있으며 높이 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된 이래 저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을 가까이서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사람들과의 친밀함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여러분들의 너그러움에 감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도시의 구역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얼굴, 미소와 눈물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념적 대립과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개인적 마음을 접어 두었습니다. 발을 땅에 붙이고 이 세상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이의 현실주의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높이 날고 더 큰 꿈을 꾸는 것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집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하신 일은 진로변경, 곧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심지어 성인들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논리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신앙과 교회에서 멀어진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 임명장을 받은 사목협력자들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회심 안에서 신뢰하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하지 못하시는 인간의 마음은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삶 안에서 종종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성령의 불이 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각자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최후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주님께서는 3일 밖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빛을 열어 주십니다. 악으로 상처 입었다 해도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된 형벌에 처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신비스럽지만 실제적 방식으로 우리 마음 안에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빛, 곧 진리, 선,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을 열어 주십니다. 가끔은 불신이나 적대감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불신과 적대감이 여러분을 가로막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시기 위해 3일 밖에 필요하지 않다는 확신을 지키십시오. 이는 또한 우리 중 몇몇의 이야기로 깊은 회심은 예측할 수 없는 은총이 활동한 결과입니다!

 

“악마는 우리 인간성을 질투해 인간을 파괴한다”

교종, 11월1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1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지혜서에서 발췌한 제1독서(지혜 2,23-3,9) 구절을 해설했다. 교종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에 대한 질투 때문에 엄청난 거짓말쟁이 악마가 인간성을 파괴하려고 우리를 유혹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악마는 존재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악마의 질투는 죽음을 초래하는 증오의 씨앗을 세상에 뿌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는 예언자의 구절을 분석하면 악마의 질투 때문에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생신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교만한 천사의 질투가 인간성을 파괴하도록 그를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 안에서 형제로서 살아갈 수 있지만, 우리 마음에는 끊임없이 시샘, 질투, 경쟁이 들어옵니다. 이와 같이 싸움과 파괴하려는 의지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부님. 저는 아무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험담하셨던 것은 뭐죠?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실 때는요? 그것이 사람을 파괴하는 겁니다.” 

야고보 사도 말처럼 “혀는 잔인한 무기입니다. 사람을 죽입니다”(야고 3,8 참조) 험담은 사람을 죽입니다. 중상모략도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신부님, 저는 세례를 받았고 열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리 안에 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형제였지만 한 사람의 시샘과 질투가 다른 사람을 파멸시켰습니다. 전쟁, 파괴, 전쟁 때문에 죽고 병으로도 죽는 사람들, 곧 이러한 현실은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군가 우리 마음에 증오의 씨앗을 뿌립니다.

배후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이런 일을 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백성사하러 갈 때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저는 이런 유혹을 받았고, 이런저런 유혹을 받았습니다.” 즉 잘못된 길로 가도록 어떤 존재가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누군가 우리 마음 안에 파괴의 씨앗을 뿌리고, 증오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세상에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수많은 자가 있다고, 이들이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다고 말입니다. 악마는 우리 인간성을 질투합니다. 저는 종종 뉴스가 테러나 전쟁처럼 파괴하기 위한 증오를 모아 놓은 내용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식수부족, 학교교육, 위생교육의 부족으로 수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일에 사용될 수 있는 돈이 왜 무기제작에 사용되며, 또 왜 그 무기들은 파괴를 위해 사용됩니까. 

이런 일은 세상에서 벌어지지만 내 영혼, 당신의 영혼, 우리의 영혼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악마의 질투의 씨앗, 증오의 씨앗을 통해서입니다. 악마는 무엇을 질투합니까? 우리의 인간성을 질투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이를 참지 못합니다.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가들은 청렴결백한 사람을 모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파괴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것이 악마의 시샘의 뿌리이며, 우리의 악과 우리 유혹의 뿌리이고, 전쟁, 기아, 세상의 모든 재앙의 뿌리입니다. 파괴하고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정치생활 안에서도 습관적일 뿐 아니라 일부는 이미 그렇게 행동합니다. 정치가는 종종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타인을 더럽히려는 유혹, 타인을 파괴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유익을 위해 건전하고 청렴결백한 정치가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타인을 파괴하기 위해, 모욕을 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인 것 같네?라고 생각하고 ‘모욕해서 그 사람을 밑으로 끌어내려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 이 질문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오늘날 세상에 이토록 많은 증오의 씨앗이 뿌려지는가? 때때로 가정에서 서로 화해가 잘 안 됩니다. 마을에서도, 일터에서도, 정치판에서도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악마의 질투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악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악입니다. 아주 미묘한 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분명합니다. 복음을 읽어 보십시오.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혹은 믿음이 없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악을 이기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길러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악을 우리의 육신 안에서 이기시고 우리의 육신을 통해 싸우시려고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엄청난 거짓말쟁이,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자, 이 엄청난 질투하는 자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한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신앙인들과 대화의 다리를 건설하라”

교종, 11월6일 수요 일반접견 사도행전 교리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에서 사도행전 교리교육을 계속했다. 교종은 가르침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의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사도 17,23 참조)에서 영감을 얻어 적개심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이교도의 세계를 바라본 것처럼, 복음과 이교도의 세계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권고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도행전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행을 계속 이어 갑시다.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에서 시련이 있은 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심장부인 아테네에 도착했습니다.(사도 17,15 참조) 정치적 타락에도 고대 영광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던 이 도시는 여전히 문화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오로 사도는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사도 17,16)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대한 이러한 충격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대신 그러한 문화와 대화하기 위한 다리를 만들라고 그를 재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도시와 가까워지기로 결심하고 가장 중요한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바오로는 신앙생활의 상징인 회당에 나가고 도시생활의 상징인 광장에 나가고, 정치와 문화생활의 상징인 아레오파고스에 나갑니다. 유대인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모든 사람과 만나 자신을 열고 그들과 대화하러 나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오로는 문화를 관찰하고 아테네의 환경을 ‘관상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집안과 거리와 광장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바오로는 아테네와 이교도의 세상을 적의가 아닌 신앙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는 우리 도시들을 무관심하게 관찰합니까? 경멸의 눈으로 바라봅니까? 아니면 익명의 군중 가운데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믿음으로 바라봅니까?

바오로 사도는 복음과 이교도의 세상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선을 택합니다. 그는 고대세계 가장 유명한 정치기구의 하나인 아레오파고스 중심에서 신앙의 메시지를 토착화하는 놀라운 모범을 실천합니다. 곧, 우상숭배자들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이, 다리를 건설하는 이’가 됨으로써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아테네에는 어떠한 형상도 없고 단지 ‘알지 못하는 신에게’(사도 17,23)라고 새겨진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것부터 시작해 청중과 공감하면서 시민들 가운데 머무르시고, 당신을 진심으로 찾는 이들에게 당신을 숨기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하느님의 이러한 현존을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 17,23) 

아테네인들이 숭배하는 미지의 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바오로 사도는 창조 곧, 계시의 하느님에 대한 성경적 믿음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 고유의 메시지인 구원과 심판에 이르기까지 설명합니다. 그는 창조주의 위대함과 사람이 만든 성전들 사이 부조화를 보여 주고 창조주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항상 찾으신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오로 사도는 베네딕토 16세 전임교종님의 아름다운 표현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분, 알지 못하지만 알려지신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아울러 바오로는 모든 사람이 ‘무지의 시대’를 넘어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회개하라고 초대합니다. 바오로는 이처럼 ‘케리그마’에 도달하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다”(사도 17,31)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암시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흥미로운 발견이었기에 지금까지 토론자들을 숨 돌릴 틈 없게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이 암초를 만납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어리석음’(1코린 1,23)으로 보여지며, 비웃음과 조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와 다마리스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또 아테네에서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두 목소리를 통해 곧,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오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리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문화와 다리를 건설할 수 있도록 성령께 가르쳐 달라고 청합시다. 항상 다리를 건설하고 항상 손을 내밀고, 공격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청합시다. 가장 굳은 마음까지 녹여 주는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여서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관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섬세함으로 신앙의 메시지를 토착화할 수 있는 역량을 베풀어 달라고 성령께 청합시다.

 

“우리 시대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 섬기는 문화혁명 필요”

교종, 예수회 사회정의와 환경사무국 회의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7일 바티칸에서 ‘예수회 사회정의와 환경사무국 (SJES)’ 회의에 참석한 200여 명의 예방을 받고 연설했다. 교종은 연설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그들 사명에 맞갖은 ‘창의적 헌신’의 길을 계속 이어 나가라고 주문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총장을 역임한 페드로 아루페 신부 뜻에 따라 탄생한 SJES는 11월4일부터 8일까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섬김, 교육, 난민들에 대한 관심, 인권보호’를 주제로 로마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이번 모임은 SJES 탄생 50주년 맞아 사무국의 사회 사도직 사업을 재확인하고자 열렸다. 교종은 스페인어로 된 길고 강렬한 연설을 통해 ‘예수회 사회정의와 환경 사무국(SJES)’이 ‘우리 시대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을 위해 행하고 있는 활동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진정한 문화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연설 내용.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 수많은 불의한 상황은 ‘국지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제3차 세계대전’과 같습니다. 곧, 인신매매와 외국인 혐오,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이기적 추구와 기하학적으로 증가하는 국가 간 불평등 및 국가 내 불평등, 그리고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인류 공동의 집(지구)에 대한 착취 등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따르기 위해서는 우선 희생자들과 함께해야 하며, 또 아돌포 니콜라스 전임총장님이 예수회를 위해 크게 원했던 악을 가려내는 것과 사도적 창의성과 사도적 깊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응답’은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진정한 ‘문화적 혁명’, 그리고 시선의 변화와 태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회적 악들이 종종 분열과 죽음의 잠재력을 가지고 사회구조들 내 뿌리내리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의 진원지인 공개대화에 참여함으로써, 구조들을 변화시키는 느린 작업이 필요합니다. 본질적으로 어제와 오늘의 예수회원들이 행해 왔고 또 앞으로 행할 여러 분야에서 사회봉사의 창의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항상 쇄신이 필요한 창의적 노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결단력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의 사도직을 식별하면서 교회를 도와야 합니다. 또 점점 더 세계화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른 교회 및 시민단체와의 네트워크를 맺고 지속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세계화란 각자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우리를 일치시키는 다자적 세계화여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문화적 종교적 개인적 정체성을 무효화하는 획일적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변화란 가난한 이들 자신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직접 계획을 주도할 때라야 세계시장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사회적 시인들, 일자리 창출자들, 주택 건설자들, 식량 생산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사도직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프로세스를 장려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과 지역사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권리들을 인식하게 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펼치게 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건설하도록 돕는 프로세스 말입니다. 가야 할 길은 미래를 열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현대의 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미래를 만나는 것입니다. 형제들과 인류 공동의 집(지구)이 처한 고통 안에서 1975년 이래 많은 동료 예수회원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는 엘살바도르 예수회 센트럴아메리카 대학교에서 발생한 예수회 사제들 피살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사건은 콜벤바흐 전임총장으로 하여금 예수회원들에게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권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소외된 자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에 대한 격려입니다. 성 이냐시오가 1550년 규칙서에 포함시킨 것처럼 예수회는 수도회 창립 초기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아루페 전임총장님은 이러한 것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까지 내려온 전통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접촉을 경험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안에서 자발적인 친밀감으로 하느님을 닮으려 하는 열망에 불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전임총장 아루페 신부님은 기도의 사람이며, 매일 하느님과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있어 신앙을 선포하고 정의를 장려하는 것은 지금까지 일부 예수회원에게 맡겨진 과제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했던 방식으로 근본적으로 일치된 두 가지의 도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특별한 자리를 찾았습니다. 소외된 하느님에 대한 적극적 관상은 우리가 소외된 모든 이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는 믿는 이들의 삶 안에서의 귀중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소중한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표현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회의 경험은 예수회를 더욱 자비롭고 복음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강화했습니다. 우리의 부서진 세상은 다리가 필요합니다.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친숙함을 제공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부서지고 분열된 세상에 다리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만남은 각자로 하여금 소외된 이들 안에서 우리의 연대를 떠올려 주는 형제의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국 난민수용소에 버려진 이들을 대상으로 했던 전임총장 아루페 신부님의 마지막 말이 적힌 상본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바랍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그분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날 그는 태국을 출발해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이 상본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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