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20]

농부에게 가을걷이철은 성적표를 받아 드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땅콩을 손질하며 몇 되나 나올까 가늠해 본다. 볕에 널어 놓은 들깨를 쓰다듬으며 우리 식구 1년 먹을 만큼 양이 넉넉한가 헤아려 본다. 고구마 한 줄 캐어 놓고 알이 잘 들은 건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바삭하게 마른 토란대를 거두어 들이며 몇 번이나 나물해 먹을 양인지 셈해 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올해 가을 성적은 '미'와 '양' 사이쯤 되는 것 같다. 가을장마와 잦은 태풍, 멧돼지와 고라니라는 변수까지 작용하여 주작목인 나락과 콩, 팥의 성적이 부진하다. 한겨울까지는 쟁여 두고 먹던 밤도 올해는 그리 많이 줍지 못했고, 감나무엔 감이 몇 개 안 보인다. 그렇다고 일감이 줄어들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니 농가 살림이란 것이 참 오묘하다.

안 그래도 수렁논인 우리 논이 최대의 과제다. 가을에 비가 잦아 물 마를 날이 없었으니 추수 때가 되어 아무리 애를 써도 모내기 때와 다름없이 발이 푹푹 빠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멧돼지가 우리 나락을 밟으며 신나게 놀았는지 다 여문 이삭이 곤죽이 되어 진흙에 빠져 있기까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우리 신랑이 나락을 저대로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추수를 그냥 포기할까 하는 고민까지 했을까.

그때 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당신이 안 베면 나라도 나락을 베겠다고 큰소리 탕탕 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추수가 시작되었는데 정작 나는 단 세 번 벼 베기에 참여했을 뿐이다. 논에 다녀오면 녹초가 되어 버리니 다른 일에 기운을 쏟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집은 집대로 엉망진창이고, 논에서는 또 일 잘 못한다고 잔소리나 듣고.... 흑흑.

추수하는 논 풍경. ⓒ정청라
추수하는 논 풍경. 볏단 더미 옆에서 간식 먹는 아이들. ⓒ정청라
추수하는 논 풍경. ⓒ정청라
들깨 풍구질 할 때 옆에서 벌레 잡는 아이들.(생포한 벌레는 닭들 몸보신 용) ⓒ정청라

안되겠다 싶어서 슬그머니 논에 안 나가고 집에서 해야 하는 일들부터 챙기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감까지 덤벼들고 있다. 예를 들어 도토리 같은 거. 올해는 밤뿐 아니라 도토리도 귀해 많이 줍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지난해 주워서 쟁여 놓은 도토리가 생각났다. 됫박으로 서너 되는 너끈히 되는 양인데 당시엔 할 일이 워낙 많으니까 한가해지면 묵 해 먹지 하고, 데쳐서 잘 말려 김치통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작년 걸 꺼내어 알뜰히 해 먹지 싶었는데 웬걸! 뚜껑을 여는 순간 곰팡이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지 뭔가. 잘 말려서 넣어 놨으니 별 탈 없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버릴까 말까' 갈등을 하다가 되살려 보기로 했다. 상태를 보니 알은 아직도 단단하여 곰팡이만 닦아 내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한데 문제는 겉껍질을 다 벗겨 내고 도토리 알 주름 사이사이에 낀 곰팡이까지 다 닦아 내야 한다는 것! 칫솔로 꼼꼼하게, 족히 수천 알이나 되는 도토리를! 그야말로 고행이 아닐 수 없다. 도토리가 귀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고민 없이 갖다 버리고 말았을 텐데, 아쉬우니까 할 수 없이 물에 담가 두었다가 작업에 들어갔다.

"엄마, 뭐 하고 있어?" (다나)

"도토리 껍질 까고 있어."

"왜 까고 있는데?"

"도토리묵 해 먹으려고 그러지. 다나도 도와줄래?"

"아니, 다랭이 오빠랑 집 만들어야 해."

평소 같으면 안 해도 된다 만류해도 기어이 달려드는 다나인데 보통 일이 아니겠다 싶었는지 가 버렸다.(요새 우리 집엔 집짓기 열풍이 불어서 아이들도 나름 바쁘다.) 다랑이는 아예 얼씬도 않고, 다울이만 가끔 얼쩡거리기에 얼른 붙잡았다.

어린이들이 만든 어린이집. ⓒ정청라
애벌레 하우스. ⓒ정청라

"다울아,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 얼른 와서 너라도 좀 도와줘."

그렇게 해서 다울이랑 둘이서 그 작업을 했다. 다울이는 나무망치로 도토리 껍질을 깨고, 나는 껍질을 까고... 꼬박 이틀, 앉은 채로 돌이 되려나 싶게 작업을 한 결과 도토리를 부활시켰다. 한 알 한 알 줍던 수고가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큰 수고를 해서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만세!!!

그러고 보면 나락 한 알에만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담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에 그만큼의 손길이 담겨 있으리라. 포기하려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생명을 생명으로 살리려는 희망의 손길이 말이다.

그러니 농사는 정말 아무나 짓는 게 아니다. 얼마나 험난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산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 고로, 농사는 사랑이고 사랑은 산길이다!

논에 가져갈 새참.(피자와 애벌레빵) ⓒ정청라
햅쌀밥 밥상. ⓒ정청라


다나가 한 살 때 한여름의 일이다.
다나가 어려서 손이 많이 가는 상황에
다랑이까지 심한 배탈이 나서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날은 덥고 아이들 둘은 서로 내 품을 차지하려고 울고 불고 난리고....
그 난리 중에 셋 다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머리 맡에 다울이 편지가 놓여 있었다.


사랑은 산길이다
언제든 길을 가다가
가시덤불이나 물웅덩이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을 끝까지 가면
사랑의 바다다
바다가 나온다

(엄마에게 다울이가)

이 노래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고,
후에 도법 스님께서 '바다가 나온다'를 '바다도 나온다'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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