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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4월 18-24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용서하시오. 모든 것이 정의로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교종, 4월 24일 성 베드로 광장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24일 부활 8일축제 내 수요일 성 베드로 광장 수요 일반알현에 참석한 5만여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 안에 용서의 힘을 넣어주신다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모든 것이 정의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며 다른 이들을 용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교종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구절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육을 이어갔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마태 6,12)라는 표현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기도’ 다섯 번째 청원에 대한 교리 교육을 마무리합시다. 우리는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빚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자연과 은총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 생명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손을 모아 기도할 때 혼자 잘났다고 자만할 여지는 없습니다. ‘제 스스로 창조된 사람’, 곧 저 혼자서 만들어진 인간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비롯해 우리에게 유리한 생활조건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체성은 우리가 받은 좋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받은 좋은 것 가운데 첫 번째는 ‘생명’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자주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이기적이기 때문이죠. 기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배우며,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노력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채워질 수 없는 빚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빚을 결코 갚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우리 삶에는 항상 용서를 구할 무엇인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게으르게 지낸 날들, 우리 마음이 원한으로 가득 찬 순간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유감스럽게도 적지 않은 이러한 경험들이 “주님, 아버지, 저희 죄를 용서하십시오.”라고 간청하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희 죄를 용서하십시오” 부분만 청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과 하나를 이루는 또 다른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부분을 추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산산조각내신 수직적 자비의 관계는 형제들과 함께 사는 새로운 관계, 곧 수평적 관계로 변화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 선한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청원의 이 두 부분은 놀라운 접속사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친구 또는 가까이 사는 사람, 이웃, 그리고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처럼 주님께 우리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시길 청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한 죄의 사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항상 용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모습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부드러운 자비의 표현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5,7.10) 복음서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잘 준비가 되어 있고 다시 받아들여질 것을 청하는 사람들의 죄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은 의무적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받은 것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어주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께서 일곱 가지 표현을 사용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 형제애적 용서를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이는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사람들이 “나는 그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한 짓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여러분이 문을 닫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제가 다른 교구에 있을 때 신부님 한 분이 자신의 절망감을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은 임종을 눈앞에 둔 노파에게 병자성사를 베풀러 갔습니다. 불쌍한 노파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노파에게 “할머니, 자신의 죄를 회개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노파는 말을 할 수 없어 고백성사는 할 수 없었지만 신부님 질문에 “네”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어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다른 이들을 용서하십니까?” 그런데 노파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 우리가 용서하는가, 용서할 수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신부님, 저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떻게 할 수 없으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주님, 제가 용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이의 접합을 찾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용서는 용서를 부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우리는 형제애적 용서에 대한 매우 강렬한 비유를 발견합니다. 함께 들어봅시다.(마태 18,21-35 참조) 왕에게 크게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만 탈렌트나 되었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오늘 화폐단위로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큰 금액임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종은 빚의 상환기한만 연장 받은 것이 아니라 전액을 탕감 받았습니다. 뜻밖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빚을 탕감 받은 직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작은 금액을 빚진 동료를 상대로 화를 냅니다. 작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은 동료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주인은 그 종을 다시 판결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 안에 용서의 힘을 불어넣으십니다. 인생에서 모든 것이 정의로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악을 막아야 하는 곳에서 은총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누군가는 책임이나 해야 할 바를 넘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악은 복수를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중단시키지 못한다면, 복수는 세상을 질식시키며 퍼져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나에게 한 대로 나도 당신에게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보복의 법칙을 사랑의 법칙으로 바꾸십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그것을 상대방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죠. 아름다운 부활 팔일축제 주간을 보내는 오늘 나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만약 나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줄 아는 것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형제들 삶에 특히 우리에게 실수했거나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 삶에, 선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소중한 것들을 말과 포옹과 미소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하는 용서입니다. 고맙습니다.

 

 

교종, 부활 대축일 스리랑카 연쇄테러에 깊은 슬픔

 

프란치스코 교종은 부활 대축일에 발생한 스리랑카 교회와 호텔 연쇄테러에 애도를 표했다. 이번 테러로 최소 207명 사망자와 45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교종은 “저는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드리다 참사를 당한 스리랑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잔인한 폭력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과 진심으로 가까이 있겠다는 원의를 표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발표했으며,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부활메시지와 강복(우르비 엣 오르비)에서도 스리랑카 연쇄 테러에 비탄과 슬픔을 표하면서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모든 이들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과 선포자가 되시오”

교종, 4월 22일 ‘천사의 월요일’ 부활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이자 ‘천사의 월요일‘(Lunedì dell’Angelo)인 4월22일 성 베드로 광장 부활삼종기도 가르침에서 “죄와 죽음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부활, 인간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되십시오.”라고 강조하면서 복음에 기록된 여인들은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만졌다며 복음이 어떻게 우리를 빈무덤 가까이로 데려가는지를 설명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그리고 이번 주 내내, 전례뿐 아니라 삶에서도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지속됩니다.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놀라운 부활사건을 기념했습니다. 파스카 성야미사에서 그리스도 빈무덤 옆에 있던 천사들이 선포한 말이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무덤가로 향했던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이루고 죄와 죽음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며, 바위처럼 단단한 기초를 우리 삶의 희망으로 선사합니다. 인간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22.24참조) 이 ‘천사의 월요일’ 전례는 마태오복음을 통해(마태 28,8-15 참조) 우리를 예수님의 빈무덤 가까이로 이끕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생각하면서 상상으로나마 그곳으로 가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두려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여인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해주려고 달려갑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다가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 그분을 만져본 것이죠. 이는 그분께서 유령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살아계신 예수님, 바로 그분이라는 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에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지금 일어난 일을 제자들에게 가서 선포하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모든 복음서들은 부활의 첫 증인들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남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있었거든요. 막달레나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베드로와 요한만이 급히 달려가 무덤이 열려있고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분을 처음으로 만나고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처음 선포한 사람들은 바로 여인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인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이 우리에게도 울려 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전하여라.”(마태 28,10 참조)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다시 살게 한 파스카 성삼일의 전례가 끝난 다음 우리는 이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분을 신앙의 눈으로 관상합시다. 우리 또한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 그분의 선포자와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활시기에 우리는 파스카 전례의 오래된 부속가를 되풀이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그분 안에서 죽음에서 삶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사랑의 자유로 건너가며, 우리 또한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안을 주는 파스카의 메시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두려움과 슬픔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감싸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몸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무엇보다도 기도 안에서, 신앙과 감사를 통한 소박하지만 생생한 기쁨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진심 어린 순간, 환대의 순간, 우정의 순간, 자연에 대한 관상의 순간을 나누면서 그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이 축제의 날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형제들, 특히 위로와 희망이 가장 필요한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부활하신 분의 선물인 평화와 평온함을 두 손 가득히 담을 수 있도록 동정 마리아께 청합시다.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세우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의 부활 메시지와 강복(Urbi et Orbi)

 

프란치스코 교종은 주님 부활 대축일의 전통적 축복인 ‘로마와 온 세상에 보내는 부활 메시지와 강복’(우르비 엣 오르비, Urbi et Orbi) 중에 우리 시대의 수많은 고통을 떠올렸다. 교종은 중동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에서부터 무기 확산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급했으며,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도 잊지 않았다. 우르비 엣 오르비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축하합니다.(Buona Pasqua)! 오늘 교회는 첫 제자들의 선포를 다시금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알렐루야! 알렐루야!”라는 찬미에 대한 초대가 울려 퍼집니다. 이 부활절 아침 저는 교회와 인류전체의 영원한 젊음, 특히 최근 젊은이들에게 보낸 주교 시노드 후속 교종권고 도입부분을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시고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젊음이십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이 젊게 되고 새로워지며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따라서 제가 모든 그리스도인 젊은이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며 여러분이 생기에 넘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과 함께 계시며,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멀리 떠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시며, 여러분이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슬픔, 분노, 두려움, 의심이나 실패로 늙어간다고 느낄 때,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힘과 희망을 다시 주시고자 언제나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과 세상을 향해 선포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삶의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쇄신이란 늘 마음에서, 양심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죄와 세상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 사랑, 평화와 형제애의 나라로 열립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십니다. 부활하신 그분께서는 당신 얼굴의 빛을 드러내시며, 시련, 고통,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살아계신 그분께서 사랑하는 시리아 국민을 위한 희망이 되시길 빕니다. 시리아 국민들은 나날이 시련을 겪고, 심지어 무관심 받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끊임없는 분쟁의 희생자들입니다. 이제는 자유, 평화, 정의의 합법적인 염원에 응답할 수 있는 정치적 해법의 책임을 쇄신해야 할 때입니다.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특별히 레바논과 요르단 등 인접국에서 도망쳐 온 모든 이들이 안전하게 고국으로 되돌아오는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해법 말입니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인 분열과 긴장으로 찢어진 중동에 눈길을 고정시킵니다.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끈기 있는 인내를 통해 증언하길 바랍니다. 저는 예멘 국민들, 특히 기근과 전쟁으로 쇠약해진 어린이들을 특별히 생각합니다. 부활의 빛이 이스라엘 사람들부터 시작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중동의 모든 위정자들과 국민을 비추는 한편, 평화와 안정의 미래를 추구하며 수많은 고통을 완화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주 리비아에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많은 가족들이 집에서 강제로 추방됐습니다. 리비아를 피로 물들이는 전쟁이 중단되길 바랍니다. 정치적 불안과 분쟁으로 상처를 들쑤시지 말고 관련 정당들이 무력이 아닌 대화를 택하길 촉구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아프리카 대륙에 당신의 평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 대륙, 특히 부르키나파소, 말리, 니제르, 나이지리아, 카메룬에는 아직도 사회적 긴장과 분쟁이 확산되고 있으며 때때로 폭력적 근본주의자들이 사회적 불안, 파괴, 죽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 불안정 시기를 보내고 있는 수단도 생각합니다. 모든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오랫동안 열망했던 자유, 발전,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를 위해 각자 부응하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 이곳 바티칸에서 있었던 영성 피정의 결실로 지속되는 남수단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노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나라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쓰이길 바라며, 모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구성원들이 공동선과 국가의 화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이번 부활이 여전히 분쟁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주민들에게 위안을 주길 바랍니다. 지속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주님께서 인도주의적 사업을 격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기쁨이 어려운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겪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 마음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저는 특별히 베네수엘라 국민을 생각합니다. 심화되는 위기로 인해 가치 있고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박탈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사회적 불의, 학대, 폭력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분열을 치유하며, 국민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일치하여 구체적인 행보를 완수하는 정치적 책임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부활의 기쁨을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니카라과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책을 조속히 찾기 위하여 니카라과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을 비추시길 바랍니다. 우리 시대 수많은 고통 앞에서, 생명의 주님께서 냉혹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장벽이 아닌 다리의 건설자가 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는 그분께서 전쟁의 현장에서나 우리 도시에서나 무기의 소음을 멈추시고, 특히 경제적으로 더 앞선 나라에서 염려스러운 무기 확산과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가지도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길 바랍니다. 무덤의 문을 열어젖히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저소득층,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 실직자들, 소외된 이들, 그리고 빵과 피난처와 인간 존엄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이들 요구에 우리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와 전 세계를 위한 희망이시며 젊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부활을 축하합니다(Buona Pasqua)!

 

 

“희망을 묻어 버리지 맙시다”

교종, 4월 20일 파스카 성야미사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20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파스카 성야미사를 집전했다. 대성전 입구에서 새 불을 축복한 다음 부활초 행렬과 파스카 찬송이 이어졌으며, 말씀전례, 세례전례, 성찬전례를 거행했다. 이날 교종은 이탈리아, 에콰도르, 페루, 알바니아, 인도네시아 출신 8명의 예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입문성사인 세례와 견진성사를 베풀었다. 교종 말씀 내용.

부활은 돌을 치우는 축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희망과 기대를 꺾어버리는 가장 단단한 돌을 치우십니다. 곧 죽음, 죄, 두려움, 세속주의를 치우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무덤의 돌 앞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 있는 돌’(1베드 2,4)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인 우리는 그분 위에 세워졌고, 우리가 용기를 잃을 때나 우리의 실패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도 그분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실망을 뒤바꾸시기 위해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덤가의 여인들에게 던져진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는 질문은 우리 각자에게 ‘희망을 묻어버리지’ 않고, 우리에게서 치워야 할 돌에 초점을 맞추라고 초대합니다. 모든 것이 잘못됐으며, 나쁜 상황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종종 ‘불신의 돌’이 희망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불건전한 ‘낙담의 전달자’나 ‘냉소적이며 비꼬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는 돌 위에 돌을 얹으며 우리 안에 불만으로 쌓아 올린 탑을, 희망의 무덤을 쌓습니다. 인생을 불평하며, 삶을 불평에 종속시키고, 영적으로 병듭니다. 이처럼 일종의 무덤의 심리학이 스며듭니다. 살아서 벗어난다는 희망 없이, 그곳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마음을 봉인해버리는 두 번째 돌, 곧 죄악의 돌입니다. 사실 죄는 잘 사는 것과 성공이 쉽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약속하며 유혹하는 것이지만 다음에는 우리를 죽음과 외로움 안에 남겨둡니다. 이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생명을 찾는 것, 지나가는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좇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왜 돈, 경력, 교만, 쾌락이라는 번쩍이는 빛 앞에서 참된 빛(요한 1,9)이신 예수님을 두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왜 세속적인 허영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생명의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 않으십니까? 드물지 않게 우리는 두려움 안에 몸을 숨긴 채 우리 한계 앞에 웅크리고 있기를 좋아합니다. 이어 이런 행동은 닫힌 마음과 슬픔 안에서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고 주님께 자기 자신을 여는 것보다 마음의 어둔 방 안에 홀로 남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일어서고, 당신의 말씀으로 부활하며, 높은 곳을 바라보고, 우리가 하늘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믿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서 언제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핵심을 바라보시는 그분께서 바라보시듯이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죄 안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자녀들을 보십니다. 죽음 안에서 부활해야 할 형제들을 보십니다. 절망 안에서 위로해야 할 마음들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삶을 바라보고 삶을 이끌고 나가기를 두려워할 때조차,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죽음을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비탄을 춤으로(시편 30,12) 바꾸시는 ‘전문가’시며, 그분과 함께 자기폐쇄에서 친교로, 절망에서 위로로, 두려움에서 신뢰로 넘어가는 파스카를 우리 또한 완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타협할 수 없는 삶의 확신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변화시켜 주시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결코 박물관에 전시된 신앙을 갖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시며, 역사책에서 알게 되는 분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 문제들에 대해서만 항상 지향을 넣고 도움이 필요할 때만 주님께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건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입니다. 이는 항상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계신 분을 찾는 꼴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자주, 주님을 만난 다음 죽은 이들 사이로 다시 되돌아가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변화시켜주시도록 우리 스스로를 내어 맡기지 않고, 탄식이나 후회나 상처와 불만을 다시 끄집어내며 우리 안에서 방황하는지요. 부활하신 분에게 삶의 중심 자리를 내어드리십시오. 현실에 무릎 꿇거나 곤경의 바다에 굴복하지 않는 은총, 죄악의 돌, 불신과 두려움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모든 것에 앞서 먼저 그분을 찾읍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들은 ‘기름붓기’ 위해 ‘기름부음’ 받았다”

교종, 4월 18일 성주간 목요일 성유축성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18일 성주간 목요일 오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교구 사제들과 함께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했다. 교종은 이날 강론을 통해 미사에 참례한 사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자신의 편안함을 찾지 말고 군중들 사이에 머무르면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라고 권고했다. 강론 내용.

저는 견진성사와 신품성사를 집전할 때 성사를 받는 이의 이마와 손에 ‘축성성유’를 듬뿍 골고루 바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유를 듬뿍 골고루 잘 바름으로써 저 자신이 기름부음 받았음을 새롭게 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는 병에 든 기름을 분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름을 붓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성소와 우리 마음을 나눠주면서 기름을 부어주는 겁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줄 때 우리는 신자들의 신앙과 애정으로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한편 우리는 신자들의 상처, 죄, 고통을 어루만져 더러워진 손으로 기름을 붓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신으로 치부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신자들의 믿음, 희망, 충실성, 관대함을 어루만져 향기나는 손으로 그들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부음과 축복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인색함, 학대, 잔인함에서 치유됩니다. 사제들은 구걸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오늘 루카복음에는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친구와 친척들이 보는 가운데 이사야의 예언을 당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백성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기 위해 보내진 ‘기름부음 받은 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 백성전체, 개인 각자와 직접적인 접촉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주님께서 우선적으로 기름 부어주고자 하는 대상자는 네 그룹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작은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과부, 바르티매오, 그리고 비유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기름부어 주심으로 활력을 얻고 구체적인 얼굴을 지닌 우리의 복음적 모델입니다. 사제들은 이들처럼 단순한 사람들이 되고 자신들이 ‘기름을 부어주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 영혼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 각자는 우리 백성의 유일한 마음을 구체화시킵니다. 우리 사제들은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하고 걸인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바라볼 때,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갖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제들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우리가 지은 죄들의 어떤 측면에 있어서 도둑들에 의해 폭행당해 초주검이 된 상처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다른 이들을 불쌍히 어루만질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로운 손길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군중이라는 단어는 경멸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의 귀에 군중이라는 단어는 특별할 것 없는 익명인 무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군중이 변화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세 가지 은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따름’입니다. 군중의 따름은 조건이 없으며 애정이 가득한 것이고, 먹을 것을 찾는 군중을 돌려보내라고 주님께 제안하는 잔인함에 가까운 태도를 가진 제자들의 인색함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성직중심주의’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먹을 음식과 안락함만 바라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혹을 끊어버리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너희가 군중들을 돌보아라!” 군중이 예수님을 따를 때 받은 두 번째 은총은 예수님을 향한 ‘기쁨으로 가득 찬 감탄’입니다. 예수님도 군중들의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세 번째 은총은 ‘식별의 은총’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식했습니다. 곧,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고, 악령들도 순종하게 하는 그분 가르침의 힘을 인식했습니다. 이는 모략하는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말문을 잠시 동안이나마 막아버린 힘입니다. 벽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처럼, 그분 은총의 행동은 몸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이처럼 주님은 포괄적인 우선적 선택의 역동성을 따르십니다. 한 개인이나 그룹에 주어지는 은총은 모두의 충분한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인 작은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과부를 기억합시다. 그 과부와 함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온전히 완수할 수 있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복음에서 언급된 행동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하늘나라에서 ‘무게’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가치 있다는 기쁜소식을 ‘우리 주위에 숨어 있는’ 많은 성인⋅성녀처럼 자신의 삶 안에서 직접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장님 바르티매오와 같이 예수님은 매일 우리를 세상에 빠지게 만드는 흥미롭고 의미 없는 이미지들로부터 우리 시선의 광채를 다시 찾아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처 입은 몸에 기름을 바르는 것에서 역사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트라우마’(Trauma)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폭행당한 사람의 상처를 붕대로 동여매고 기름으로 발라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처 입은 몸에 기름을 바르는 것에서 트라우마가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과 가족들, 배척당하고 불필요한 존재처럼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이며 역사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잡혀간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전쟁포로들입니다. 이들은 창끝에 놓인 자들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일과 예술에 의해 형성된 우리들의 문화의 기름부음만이 새로운 형태의 노예상황으로부터 우리의 도시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도시들은 창으로 점령되는 게 아니라 이념적 식민지화의 가장 미묘한 수단으로 점령됩니다. 따라서 사제들은 우리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청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신자들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 묵상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19일 성금요일 로마 콜로세움에서 거행된 올해 십자가의 길 각 처의 묵상을 에우제니아 보네티 수녀에게 맡겼다.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소속 보네티 수녀는 ‘노예제 근절협회’ 회장이다. 보네티 수녀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통해 미성년자 인신매매 피해자와 성매매 피해 여성 등 인신매매 희생자들과 이민자들을 기억했다. 보네티 수녀는 인신매매라는 재앙에 맞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사회 내에서 새로운 형태의 십자가형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묵상했다.

어려운 이웃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

제1처, 사형선고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묵상은,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정책에서 비롯된 무관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어려운 이들의 울부짖음’에 빌라도 같은 권력자들이 귀 기울일 수 있길 바라는 기도로 이어진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십자가형에 직면한 이들의 모습을 본다. 노숙자, 직장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 엄청난 고생을 겪으며 이주해왔으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민자들, 그리고 피부색이나 사회계층에 따라 차별을 당하는 아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발견하기

제3처 예수님께서 처음 넘어지시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통해 현대의 사마리아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두려움과 외로움,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육체적, 도덕적 상처를 사랑으로 보살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가장 마지막에 서있는 이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타인의 눈물, 괴로움, 고통의 외침에 무감각해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우리는 하느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제4처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가족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어린 딸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굴욕과 경멸, 죽음이다.

인신매매 피해자를 생각하자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신 장면에서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산과 들, 바다에서 노동착취당하는 아이들, 인신매매에 납치돼 사고 팔리는 아이들을 본다. 이 아이들은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권리를 박탈당했다. 인신매매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이 문제 해결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긴 여인들을 위로하시는 모습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나 있으며 특별히 여성들이 인신매매 문제를 이해하고 용기를 갖고 행동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쓰고 버리는 문화에 대한 반성

제9처 세 번째로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진이 빠지고 굴욕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소녀들이 겪는 치욕과 연관지어 묵상한다. 이 소녀들은 신체와 꿈을 망가뜨리고 학대하는 폭력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 이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수많은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는 ‘쓰고 버리는 문화’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권력과 돈의 우상화

제10처 옷 벗김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존엄을 박탈당하고 ‘상품’으로 전락한 아이들의 모습에 비할 수 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권력과 돈이라는 우상에 대해 묵상하길 청한다. 한편, 이 세상에는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이들이 존재한다. 특별히 지중해 지역에 많이 있다. 이들은 빈곤, 독재, 부패, 노예제 등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희망

제14처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한다. 이 묵상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새로운 묘지”, 곧 우리가 돕지 못했거나 돕지 않았던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공간인 사막과 바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각국 정부가 ‘권력의 궁전’ 안에서 문을 잠그고 앉아 토론에 열중하는 동안, 사하라 사막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쓰러진 이들의 유골로 가득 찼으며, 바다는 수중 무덤이 되고 말았다.

이번 십자가의 길 묵상을 지도한 보네티 수녀는 예수님의 죽음이 국내외 지도자들로 하여금 모든 개인을 보호하는 그들의 역할을 기억하도록 하는 실마리가 되길 희망하면서 올해 십자가의 길 묵상을 마무리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민족 및 종교 간의 친교, 인정, 새 생명, 기쁨, 희망의 등불이 되길 바랍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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