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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수도자"의 틀을 바꾼 사람: 메리 워드[서평 - 구영주] "메리 워드의 위대한 선물", 크리스틴 버크, 예지, 2017
"메리 워드의 위대한 선물", 크리스틴 버크, (장혜선), 예지, 2017. (표지 제공 = 예지)

하느님의 뜻에 항상 귀 기울이고 그 뜻을 알아차린 후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여성. 수도생활 양식의 파격적 변화의 중심에 섰던 여성. 이 여성이 바로 예수수도회 창립자 메리 워드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1585년에 태어나 1645년에 세상을 떠난 이 여성에게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경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가경자’란 교회가 ‘영웅적인 덕’을 지닌 인물을 시복 후보로 지정해 잠정적으로 일컫는 호칭으로 장차 성인품에 오를 사람을 말한다.

메리는 1585년 신앙이 깊고 부유한 부모의 맏이로 태어났다. 메리의 부모는 정부가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고 마구잡이로 가택 수색을 해서 제멋대로 체포, 감금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연락망을 만들어 영국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메리는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결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나이 든 하녀에게서 들은 수도생활에 깊이 매료되었다. 메리는 하느님이 자신을 수도성소로 부르고 계심을 확신했으나 가족의 반대에 부딪쳐 6년을 기다린 끝에 생토메르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곳에서 예수회 신부를 만나 청빈 글라라 수도원에 입회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가대 수녀로서 봉사했으나, 1년 뒤 이 생활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수도원을 떠났다. 기도가 유일한 소임이던 글라라회에서 메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다른 어떤 것’이라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메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조언을 들으며 자신의 영적 체험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가늠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 메리에게 많은 감화를 준 이냐시오 영성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지속적 관상과 식별을 통해 예수님과 친근해지기를 강조했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감지하게 했다. 메리는 거룩해지기 위해 속세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영적 체험을 가족처럼 지내는 가까운 여성들과 나누었는데, 그들은 모두 영국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메리와 동료들은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생토메르에 자리를 잡고 하느님께서 앞날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드렸다. 그리고 생토메르에 영국 소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와 그 지역의 빈곤층 소녀들을 위한 주간학교를 열었다. 동료들은 신앙을 위해 싸우려면 좋은 교육을 받은 강인한 여성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또한 다른 동료들은 비밀리에 영국으로 돌아가서 교황의 뜻을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려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보살폈다. 이 초기 동료들을 흔히 ‘열린 원의 동료들’이라고 일컬었다. 메리의 공동체는 1609년이 지나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자 이 활동적인 단체에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들었고,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재정이나 영적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모여든 이들을 영적,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것에 최우선적 관심과 책임감을 두었다. 학교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메리의 공동체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두 가지 모순적인 사명의 부르심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수녀로서 봉헌의 삶을 살라는 것 그러나 더 나아가 당시 수도생활에서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동시에 하라는 부르심이었다.

1606년, 런던에서 메리 워드가 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서는 속세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당시 영성의 지배적 흐름이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여성들은 나약한 존재로서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으므로 여성 수도자들은 주교나 남성 수도회 장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메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요크에서 지냈던 초창기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 런던에서 활동하면서, 여성은 절대로 나약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독자적 창의성이 있고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는 데 뛰어나다고 확신했다.

메리는 여성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 계획서 작성에 착수했지만 메리의 계획은 조롱 대상이 되었고 격심한 저항과 반대에 부딪혔다. 교회는 여성이 그런 방식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는 논박도 나왔다. 그러나 메리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메리는 여성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데 아무런 한계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여성이 다른 이들의 신앙을 증진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할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615년 메리는 피정을 마치고 모든 성인의 날 자신의 기도 중에 거룩함이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지혜와 진리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거룩함’의 진수인 메리의 보석 같은 이 신앙체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선물로 남아 있다. 메리의 ‘의로운 영혼’은 하느님께 온전하게 마음을 연 놀라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정의는 우리 내면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과 다른 이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말한다. 메리는 이것이 인류에게 분별력과 정직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서 진실한 지혜를 전하시는 방법이라고 이해했다. 예수회원들은 새로 등장한 메리의 수도회에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수도회의 회원들은 계속 늘어났다. 메리는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도 앞으로의 일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다고 믿었다.

“오, 하느님, 당신은 얼마나 자유로우시고 당신의 친구로 허락하시는 이들은 얼마나 풍요로운가요” 메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자유를 강조했다. 이는 이냐시오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 발견하기”와도 일맥상통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다.

1621년 메리는 수도회 인준을 직접 청하러 교황을 찾아가지만 허가는커녕 추기경들의 방해로 폐쇄교령이 내려지고 1631년 메리는 체포되고 청빈 글라라회 앙어 수도원에 감금된다. 공식 박해가 시작되고 동료들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으며 수도복을 입어서도 안 되고 영적 대화를 나누거나 수도회라고 주장해서도 안 되었다. 1630년대는 잔혹하기로 유명한 30년 전쟁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다. 앙어 수도원 감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메리는 로마 법정에서 종교재판을 받으라는 출석 요구서를 받았지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1632년 3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로마에 도착했다. 수도자의 신분도 주장할 수 없고 재정상태도 어려운 가운데 메리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모순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메리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찬미의 고백을 남겼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질서 정연한지요! 저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시여” 이는 메리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전적으로 의탁하는 깊은 평화와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메리는 자신에 대한 포악한 공격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소속감,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에서 배척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1625년 6월 26일, 메리 워드가 로마의 성 엘리지오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1637년 9월 마침내 메리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을 허락받았다. 그들은 39년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메리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고 재정도 바닥이 나서 모든 희망에 먹구름이 끼었지만 메리와 동료들은 학교를 열기로 작정한다. 그러다 42년 시민전쟁이 발발했고 메리와 일행은 혼란스런 내전의 난민이 되어서 전란이 휩쓸어 버린 들판과 가옥들이 남은 터전으로 돌아왔다. 메리의 건강은 차츰 악화되어 44년 말에 이르러서는 임종이 임박했음이 분명해졌다. 메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걸어온 길이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성소였다고 확신했다. 임종의 침상을 둘러싼 동료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여러분의 성소에 항구하고, 성소의 본질을 참되게 살며, 성소를 사랑하십시오.” 메리는 하느님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1645년 1월 30일 선종하였다.

1749년에 총장이 통솔하는 수도원으로 승인 받았으나, 메리 워드는 수도회 창립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1909년에서야 비로소 메리 워드는 수도회의 창립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원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떤 일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천국에 들게 해 주시면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 메리가 선종한 1645년 1월 30일, 메리 포인츠가 바바라 뱁도르프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고난이 많았던 메리의 생애를 통해 다시금 성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각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메리의 주장대로 성소는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며 그것이 일반적이든 특별하든 똑같이 항구하게 효율적으로 사랑으로 키워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여성의 존재가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던 시절에 메리 워드는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하느님 앞에 존엄하고 독립적 존재로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또한 거듭 투쟁하며 자신 안의 하느님 뜻을 펼치는 모습은 참으로 선구자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메리 워드는 더욱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구현하며 동료들에게도 권유한다. 교회 내의 모순과 갈등, 외압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하느님께 의탁하며 신앙을 지켜 나가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송두리째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은 진정한 수도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메리 워드가 설립한 예수수도회(옛 동정성모회)의 미션스쿨을 졸업했지만 이토록 메리 워드가 남다른 신앙의 의지와 하느님과의 깊고 내밀한 관계를 맺고 청소년 사업과 교육에 열정을 지닌 훌륭한 분이심을 미처 몰랐으며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분의 일생을 돌아보고 깨닫게 되어 무척 고무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이 삶의 모토가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메리 워드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열정과 유연성이다. 그녀는 당시 봉쇄구역에서 기도만 하던 수도생활에서 벗어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뛰어들어 가난한 이웃들과 삶을 나누고 살아가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소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였다. 이는 당시 수도회의 분위기와 영성을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메리 워드는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의 소명에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앙이란 외부의 상황과 혼란 속에서 내적 질서를 찾고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자신이 온전히 놓이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메리 워드의 신앙 정신을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 그분의 목소리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는 온전한 의탁이 절실한 시대다. 소명은 그분 사랑의 속삭임이자, 내 안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작고 아름다운 그러나 확고한 그분의 음성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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