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우리 아버지”, 프란치스코 교황, 마르코 포짜, 한마당, 2018

우리가 늘 자주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는 어떤 뜻이 숨겨져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

우리 아버지

오늘날 우리는 모두 고아다. 버젓이 가족이 있는데도 고아가 된다. 너무나도 바쁜 아버지들로 인해 돌봄이 필요한 아이와 젊은이들은 육적, 영적 고아 상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느끼고 있는 스스로 고아라는 마음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대화하지 않고 교육의 본분을 수행하지 않으며 마음에 버금가는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원칙과 가치 규범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자녀들에게는 세끼 밥 못지않고 절실하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사회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버지든 자녀든 모두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 말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면 너무나 가깝다는 친근감이 들어 놀랍다. 하지만 하늘에 계시다고 장소를 정하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친근감과 거리감 사이에서 종교가 탄생한다. 우리 종교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사람이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을 찾아나서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늘’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늘은 그분의 능력, 그분의 사랑, 그분의 아름다우심이 한계가 없음을 가리킨다. 루카 복음 15장의 비유처럼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버지는 늘 거기 계시면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늘에’라는 말은 대단하고 엄숙하며 동시에 늘 가까이 계시고 우리와 함께 걸으심을 말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우리 아버지”, 프란치스코 교황, 마르코 포짜, (성염), 한마당, 2018. (표지 제공 = 한마당)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게 하는 무수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우리 자신이 그분의 팔에 안긴 아기처럼 느끼는 일이다. ‘자비’, 이것이 진짜 그분의 이름이다.

‘아버지’라는 호칭에 예수님은 두 가지 축원을 묶어 놓으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다운 기도이며, 무엇보다 하느님의 주권, 즉 사랑의 주권이 우리 삶에서 발휘될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세 가지 청원은 양식,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의 도움이다. 그리고 이 청원의 기도 사이에는 성령께서 계신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느님 나라는 존재하고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미 온 동시에, 아직 다 오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든 이와 함께하신다. 혼인하는 아들의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하면서 “모두 오라, 선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오라”고 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신다. 역사의 주인공은 걸인이며 그것은 물질을 동냥하는 사람만 아니고 우리와 같이 영적으로 가난한 영혼을 말한다. “주님, 당신의 나라가 오길 바랍니다.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까닭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는 일종의 구걸이다. 그리고 동시에 오셨다는 확신의 닻을 내려 끌어올리는 행위이다. 우리의 활동은 나약하고 작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순간 우리는 난관이 두렵지 않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창세기는 인간의 첫 ‘아니요’를 보여준다. 이는 창조주를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 머리로 해내려고 했을 때,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작정했을 때다. 그 결과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벗어나 결국 자신을 잃고 말았다. 죄의 여지와 악의 그림자가 없는 마리아의 ‘예!’는 온전한 그분 뜻에 합치하는 ‘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 얼마나 자주 많이 불발된 ‘예!’를 쌓아두고 있는가. 하느님께 ‘예!’라고 말씀드리는 일은 진정 독창적이며 모든 일의 근원이 된다.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점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출발점이 된다. 마리아께서 당신의 ‘예!’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 안에서 당신의 뜻이, 선한 뜻이 이루어지소서. 우리의 ‘예!’는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오늘날 세계에서 하느님의 힘은 다름 아닌 밥상에 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찬의 성사에 있다. 그분과 함께하기에 우리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영적 음식으로 우리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시길 청한다. 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상징이다.

“성체는 나약한 이들에게 베푸시는 관대한 영약이며 양식이다.”(“복음의 기쁨” 중) 그래서 우리가 비록 넘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신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진리 안의 사랑”에서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 곧 연대와 재화의 분배에 대한 가르침에 응답하는 교회의 보편적 윤리 명령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오너라”(요한 7,37)라는 말씀도 그렇다. 이렇게 하느님은 자비로운 얼굴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내셨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은총’을 입는다면 그제야 비로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용서할 능력이 있다. 내가 먼저 용서받았으므로 나도 용서한다.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왜 죄인들을 용서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용서를 주고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적어도 잘 살수 없다. 특히 가정에서 그러하다. 우리는 날마다 서로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처를 즉시 봉합하는 일이다. 너무 지체하면 매사가 힘들어진다. 상처를 낫게 하고 비난을 멈추게 만드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과하지 않은 채 하루를 끝내지 않는 일이다. 부부지간, 형제자매간, 고부간에 만일 서로가 즉시 잘못을 빌고 용서한다면 우리가 저지르는 크고 작은 못된 짓이 가져올 진동과 균열을 이겨 낼 힘이 생긴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 덕분에, 하느님께 진정 용서를 받았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힘이 생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유혹에 떨어지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분이 나를 유혹에 던져 넣으신 다음, 유혹에 떨어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시는 게 아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유산을 달라는 건방진 아들의 행동을 벌하지 않고 유산을 그냥 내맡겼을 뿐 아니라 집을 나가 온갖 망나니짓을 다 저지르고 돌아왔을 때도 오로지 가슴 아프게 보고 싶었다는 말만 할 뿐이다. 아버지는 인간이 만든 정의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다. 당신 자녀들을 상대로 이런 방식의 사랑을 간직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고 적개심을 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은 없다고 공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 없이 사실 수 없다. 그분은 인간이 없다면 결코 하느님이 아니시다. 우리 없이 못 사는 분은 그분이시다. 이것이 참으로 위대한 신비다. 이런 확실성이 바로 우리가 갖는 희망의 원천이다. ‘주님의 기도’의 모든 청원에 이런 희망이 서려 있다.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 사이에는 분열을 일으키는 악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어둠 속에, 혼란 속에 찾아온다. 성서의 말씀대로 악은 밤에 가라지를 뿌리러 온다. 교묘하고 민첩하게 선 가운데 악을 심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것을 분별해 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능하며 마침내 종말에 심판하신다. 여기서 종들의 성급함과 주인의 참을성 있는 기다림이 대조를 보인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선인과 악인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각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밭을 보신다. 선의 싹도 보고 신뢰하시며 그것이 익기를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신다. 애를 태우며 우리를 맞이하고 용서하시려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

주인의 태도는 희망의 자세다. 하느님의 참을성 있는 희망 덕분에 가라지, 다시 말해 많은 죄를 지닌 악한 마음도 마지막에는 선한 밀알이 될 수 있다. 그분의 인내는 결코 악에 대한 무분별이 아니다.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너지지 않는 신뢰심으로 지탱하는 희망이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 그것은 우리를 향해 항상 목말라계시는 그분께 드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기도이다. 시몬 베유가 지적했듯 주님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지 않은 기도문은 더 이상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이 이름을 부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여전히 아직도 그분을 아버지라 고백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분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께 내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 들판의 꽃보다 나를 더 잘 입히고 먹이고 키워주시는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이자 의탁이다. 그대와 나, 우리 인생을 통틀어 누군가를 이토록 신뢰해 본 적이 있었던가.

교황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물려받은 상속의 기도이고 그래서 뿌리로 돌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당신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분들은 조부모님들이고 주님의 기도는 뿌리로 돌아가는 기도임을 강조하신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조용히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나의 뿌리, 내 믿음의 원천, 내 생명의 근간이신 아버지. 너무나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둘째 아들의 심정이 되어 여쭈어 봅니다. 나의 아버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나, 이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곳은 따뜻하고 아버지가 계시니까요.

아버지, 나의 아버지....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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