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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9 - 토론과 공론이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자[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지난 10월 31일, 루터가 교황청의 부패에 맞서 비텐부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바로 그날, 우리신학연구소는 남녀 수도회 기구와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500년이라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교회개혁과 관련해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교회일치를 주제로 신학적 토론을 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부제인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는 죄를 짓고 난 뒤 아담과 카인에게 그러했듯이 ‘한국 천주교회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하느님의 준엄한 물음으로, 또 이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떤 응답을 해야 하는지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심포지엄은 꽃동네를 비롯해, 인천 성모병원, 대구 희망원, 성가정 입양원, 대구 파티마병원, 청주 사제 폭행사건, 충주 성심맹아원, 유치원장수녀 원생 폭행사건 등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단발성의 우발적인 것도 있겠지만, 수용인들의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얽히고설킨 결과의 산물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교회개혁이라는 횃불을 치켜든 지 500년이 지났지만 2017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쇄신과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것이어서 ‘교회일치’라는 말로 피해갈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이번 심포지엄의 배경이 되었다.

이미 내정된 발표자를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외압과 우여곡절에도 심포지엄에서는 “수용소가 존재하는 한 복음의 기쁨은 없다”며 교회가 먼저 나서서 ‘탈시설’에 앞장서 ‘수용인’들이 집단수용시설에 격리 수용시키지 말고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직접적이고도 올곧은 제안을 내놓았다. 이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법인의 90퍼센트가 종교계이고 또 대구 희망원 인권유린 사건도 이런 시설수용의 문제로 지적돼 왔기에 ‘경영’이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 태도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과 제안이 처음은 아니다. ‘꽃동네’ 시절로 올라가면 이미 수십년이나 묵은 얘기다. 한국에 장애인 그룹홈 개념을 처음으로 들여와 지금까지 실천해 온 천노엘 신부 같은 이들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여지없이 파묻혀 버렸고 지금도 공명 없는 메아리로만 떠돌고 있다. 또 서소문과 천진암 같은 성지, 성역화 사업이 배태하고 있는 교회의 몰역사적 처사나 배타성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진정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이런 비윤리적 사태가 교회의 이름으로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교회의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평신도들이 철저히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것의 대안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안한 대로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나누고 합리적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공동합의성’에 바탕한 교회, 곧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안한 ‘친교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교황은 성 요한 크리스토모의 말을 빌어 바로 이것이 시노드이고 ‘시노드가 교회’라면서 2018년에는 청년에 관한 시노드를, 그 이듬해에는 아마존 지역의 토착민과 생태계 파괴와 관련한 범 아마존 지역 시노드를 개최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열린 장에서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시노드가 바로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공동합의성은 단지 몇 명이 제한된 공간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그것이 모든 이,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논의하고 채택하는 과정을 말함에 다름 아니라고 보인다.

10월 3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개혁’ 세미나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강한 기자

얼마 전 주교회의에서는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과 관련된 공론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는 4대강을 예로 들면서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계, 학계 인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나 합의를 생략하고 전문가에게 맡기라며 합당한 법과 절차도 무시한 채 추진했다가 현 상황처럼 4대강 유역의 생태계 파괴로 결과 됐다고 비판했다. 1장 분량의 성명서에 ‘(소수) 전문가’라는 단어가 9회나 등장하는데 이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을 지적할 목적보다는 국민의 생각이나 합의과정이 생략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성명서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국가가 전문가들의 견해와 분석을 충분히 존중하고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제한된 전문가 집단이 모든 결정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국민 다수의 기본 인권과 생명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갖고 사태의 진상을 포괄적으로 인식하고 식별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포함한 국민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의 선택을 정책에 반영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는 국민의 주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인용문은 우리가 위에서 논의해 온 공동합의성 또는 공론화 문제의 핵심을 간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국가’를 ‘교회(계)’로, ‘국민’을 ‘평신도’로 바꾸어 지금 당장 읽어 보시라. 교회 당국은 교회 밖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해 평신도의 올바른 판단을 돕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핵문제’니까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논의한 주제 역시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론화의 필요성이 부정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앞서 벌어진 사태나 또 다른 주제로든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토론하는 공론장이나 공론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근 터져 나오는 여러 사건들로 미루어 보건대 앞으로는 이러한 ‘이중 기준’은 통할 것 같지 않다. ‘정부가 국민의 주인이 아니다’고 옳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 당국이 평신도를 대상화시키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 대목에서 심각히 성찰해 볼 일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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