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인권이 유린당하고, 정의가 훼손되는 현실에 대해 강한 저항과 분노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이 분신(焚身)이나 투신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분신을 감행하는 의인들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감행한 이가 그리스도교인인 경우, 그의 소신 있는 행동이자 강한 절규가 아주 간단히 “자살”이라는 말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교회에서 자살은 “죄”로 인식되어 온 행위로서 과거에는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는 미사 봉헌도 금기시했기에 민감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분신이나 투신과 같은 결단의 행동은 조금 미뤄 두고, 일반적 자살은 과거보다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여진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살을 하게 된 배경에 자살자의 육체적 정신적 약함이 있다는 걸 감안하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신학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사목적 배려를 통해 죽은 이의 고통과 유족의 아픔에 공감해 주려는 마음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예전 속풀이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건가요”를 함께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타인의 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자살을 금기시하는 태도는 비단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생명도 소중히 여겨 살생을 금하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라고 해서 우리의 신체, 머리털,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불의가 의로움으로 바뀌길 염원한 이들의 분신 자살에 윤리적 잣대를 앞세워야 할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모든 생명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의 생명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히 다뤄야 하건만 자기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인간적 나약함에 짓눌렸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맥락과는 달리, 사회적 불의에 대해 강한 반발을 표명하는 방법으로 “극단적”으로 사용되어 오는 투신이나 분신 등은 어찌 이해해야 할지.... 그런 소식을 접할 때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제가 불교도였다면, 그 종교문화 안에 있는 “보시”나 “등신불” 같은 고귀한 자기 희생으로 이해해 봄직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낯선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한 가지, 저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고백은, 자기를 희생하여 불의가 의로움으로 바뀌고, 다툼이 화해로 변화되기를 염원했던 이들을 윤리적 잣대 앞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판단 대신에, 참으로 안타까운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선과 바꾸고자 했던 이들의 아픈 사연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사건은 분신한 프란치스코 형제를 위해 병자성사를 드리러 병원 중환자실을 방문했던 것이었습니다. 병자는 사실상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그의 가족들이 그가 떠날 길을 잘 준비해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위로해야 할 대상, 즉 사목적으로 배려해야 할 대상은 병자만이 아니라 남겨질 가족들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는 죽음을 앞둔 이보다 그의 유족이 더 위로받아야 할 이들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미사 중에 프란치스코 형제를 기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이 세계에 하느님의 평화가 도래하길 청해 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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