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노사목 사무국장에서 심리상담사까지 25년 김은숙 씨

“노동사목은 197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노동자의 수많은 사연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해고의 고통, 노동조합 설립의 기쁨을 함께했던 곳. 구속되거나 죽어간 동료들을 보면서 서로를 위로했던 여기. 2008년 인천교구 노동사목 30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김은숙 씨(엘리사벳)는 그간 거쳐 간 노동자들이 바로 노동사목이라고 생각했다. 교회도, 실무자도 아닌 수많은 노동자의 사연으로 이뤄진 곳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1993년 부평 노동사목에서 스물일곱 살부터 시작해 25년째다. 한 명분의 임금을 3명이 나눠 받으면서 활동했던 시절을 지나 사무국장을 거쳐 지금은 심리상담을 맡고 있다. 노동사목이 시대에 맞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도 함께 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은숙 씨에게 지난 25년간 인천 노동사목의 역할과 방향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고, 특히 오늘날 노동자의 심리치유가 중요한 이유를 들었다.

지금은 대부분 민주노총에서 지원하는 일을 이전에는 노동사목이 했다. 노조를 만들기 위한 준비- 노동자, 노조가 무엇인지 등 교육부터, 모의 교섭, 회사 경영분석 등 노동조합의 실무를 봤다.

“1990년대 말 중소기업 사업장에서 투쟁이 정말 많았어요. 텐트에서 투쟁할 때 주전자, 버너 등 필요한 것들 가져다주고.... 회사에서 칠 것 같으면 같이 밤새워 지키고....”

당시 전주교구 신학생들이 매년 겨울마다 부평 노동사목으로 현장 체험을 오곤 했는데, 남자들은 다 모여 달라는 요청에 신학생들도 같이 지원을 나가 밤새 각목을 들고 교대 섰다고 한다. (지금은 통합됐지만, 당시는 부평, 주안, 부천 노동사목으로 나눠졌었다.)

▲ 김은숙 씨 ⓒ배선영 기자

그는 특히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잊지 못했다. 대우차 투쟁에 함께 하면서 그는 “노동자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봤”고 노동자에 대한 심리 치유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2001년 2월 대우자동차는 부평공장 생산직 노동자 1750명을 정리해고 했다. 농성 중이던 노동자와 가족들을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부평공장에 진입해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갈 곳 없는 노조 지도부와 수배된 노동자들이 부평 산곡동 성당 옆에 있는 샤미나드 피정의 집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이어갔다. 당시 경찰이 성당과 피정의 집에 들어와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매일 저녁 미사가 있었고, 가족,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을 열고, 해고자 가족을 위한 생계비 지원 등을 도왔다. 교구 사제들이 월급에서 떼서 해고노동자의 자녀 73명에게 장학금 4300만 원을 주기도 했다. 그 1년간 당시 집행간부 12명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해고된 뒤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사람도 봤고, 갑자기 막막해진 생계 때문에 예민해진 부부, 그 사이에서 불안한 자녀. 그는 눈물 나는 장면이 많다고 했다.

회사에서 보낸 해고 통지서가 날아오는 날. 집에서 대책 없이 해고통지서를 받을 노동자들에게 일단 조합으로 모이라고 공지하기 위해 주소록을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안내문을 돌렸다. (모두 핸드폰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간석동에서 안내문을 나눠 주던 그는 해고통지서를 배달하는 집배원과 마주쳤다. 서로 뭘 돌리는지 아는 상황에서 같은 집에 다른 내용의 안내문을 돌렸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해고통지를 받고 절망하던 노동자와 그의 아내가 놀라던 장면, 생활에 비관해서 자살한 사람, 농성장에 전투 경찰이 들어와 무방비 상태로 도망 나온 노동자가 방에서 울고 있는 모습,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또는 화재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이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이들.

노동자의 투쟁과 삶을 곁에서 보며 정신, 심리적으로 지원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달은 그는 상담심리를 공부했다. 처음부터 그가 상담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사목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하려면 이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해 시작했다.

2004년 심리 상담이 대중화되기도 전,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노동사목에서도 상담 기능을 할 수 있게 준비하고 싶다고 했을 때, 노동운동에 심리 상담이 무슨 도움이 되냐는 부정적 반응도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반응에 서운했지만, 이 일은 “가톨릭”이기 때문에 노동사목에서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 인천교구 노동자 센터에는 카페, 도서관, 강당, 상담실, 쉼터가 있고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늘 열려 있다. (이미지 출처= 인천교구 노동사목)
인터넷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노동법이나 부당노동행위 등에 관한 교육은 실효성이 떨어졌고, 노조 설립부터 운영까지 전반을 지원했던 업무도 지금은 민주노총에서 도맡고 있다. 그는 시대에 맞게 (노동사목의) 정체성을 빨리 잡지 않으면 문을 닫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집중한 인성교육과 상담으로 방향을 잡았다.

2011년에 지은 노동자 센터에서는 심리상담을 비롯해 노동상담, 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하고, 카페, 노동자 도서관 등 다양한 분야로 운영하고 있다. 김은숙 씨는 더는 사무국장이 아니라 심리상담가로 일하며, MBTI, 에니어그램 등에 관한 교육도 맡는다.

그는 상담의 역할이 예전에는 공동체에서 저절로 이뤄졌다고 했다. 친구, 이모, 삼촌, 엄마가 상담사였다는 것이다. 노동사목 초기에 건강한 공동체 문화가 있을 때만 해도 서로 외로움을 달래 줬고, 힘든 이야기를 들어 주고, 위로했다. 그는 하지만 지금은 노동자 사이에서도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나뉘면서 갈등이 생기고,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면서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사실 상담사가 없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데, 그게 안 되니 돈을 받고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참 슬픈 일이며, 돈이 없으면 그것마저 못 받는 게 더 슬프다”고 안타까워했다.

상처받고, 위로받을 길 없는 노동자를 위해 노동사목은 심리 치유의 역량을 키웠고, 나아가는 중이다. 지금은 노동자 센터로 찾아오는 이를 상담하고 있지만, 그는 결국 사업장과 직접 연계하는 체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후배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김은숙 씨. 25년간 있다 보니 노동사목이 “생활”이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이젠 그의 “의리”다. 투쟁하던 시절 앞에 나서서 싸우지 못해 열등감이 있었다던 그는 뒤에서 사람들을 잘 챙겼고, 누구보다 노동사목에 오래 남았다. 그게 그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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