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9일(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사회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는 자아를 크게 두 가지, 곧 주체적 자아(I)와 객체적 자아(Me)로 구별한다. 자신의 행동과 사상을 직관적으로 주관하는 주체적 자아는 사회화 과정 속에 다듬어지는 객체적 자아와의 조화를 통해 성숙한 자아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게 미드의 입장이다. 예수는 어떨까. 예수만큼 주체적 자아를 마음껏 휘두른 사람이 있을까. 객체적 자아는 아에 깡그리 무시한 게 한두 번도 아니다. 안식일은 물론이고, 성전까지 뒤엎는 예수에게 객체적 자아는 도대체 무엇일까.

예수의 자아상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철부지’다. 철부지로 번역된 그리스 말 ‘네피오스’는 ‘인간이 덜 된 존재’ 정도로 인식되는 말마디다. 아직 인간으로 보기 어렵다는 인식이 ‘네피오스’에 깔려 있었고 예수 시대 유대 사회는 그런 어린이들에겐 하느님의 말씀, 곧 토라를 가르치지 않았고 지키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인간에게 하느님 말씀은 유효한 것이었으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간다운 지혜와 슬기를 갖출 만한 나이는 만 13세 이상이어야 했으니까.

예수의 자아상은 철부지로서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담아내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사회화 과정 속에서 예수는 ‘Me’를 찾지 않았다. 오롯이 하늘을 향해,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객체적 자아를 완성했다. 하늘을 향한 자아의 형성은 세상을 외면한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이른바 ‘사회화’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사회의 주류에 의한 인위적 지배를 거친 편향된 질서일 수밖에 없지 않나. 예수는 그 편향성에 대해 저항했다. 그리고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인권 유린과 차별을 거부했다. 예수는 그 저항과 거부를 통해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의 자리에 함께했다.

온유하다, 겸손하다라는 말마디는 윤리도덕적 수행의 말마디가 아니다. 온유하다는 그리스 말 ‘프라우스’와 겸손하다는 그리스 말 ‘타페이노스’는 물질적, 정신적 가난과 나약함을 가리킨다. ‘사회화’ 과정 속에 잊혀진 이들, 그들 안에 예수는 하늘을 향한 객체적 자아를 완성시켰다. 요컨대, 하늘이란 곳은 땅의 가난이었고 땅의 가난 속에 하늘은 온전히 열려 있었다. 예수의 객체적 자아는 가난한 하늘이었다.

우린 여전히 사회 속에 익숙한 이들 속에 익숙함에 대한 교육을 최선으로 치부하며 ‘현실 논리’에 젖어 산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가난한 것을 두고 경쟁에 뒤처진 실패의 삶으로 규정하거나 게으름의 산물로 업신여기는 현실이 있는 한, 예수는 없다.

▲ ‘사회화’ 과정 속에 잊혀진 이들, 그들 안에 예수는 하늘을 향한 객체적 자아를 완성시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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