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11일(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하느님 사랑은 가차없는 무모함에 가깝다. 아무리 사랑스럽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다른 존재와 하나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하느님으로서 죽는 게 굳이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요한 복음은 믿는 사람의 생명을 위해 신이 죽는다는 역설을 복음서 전반에 걸쳐 되뇌이고 각인시킨다.

하느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은 서로 뒤엉켜 둘이 하나인 듯 살았다. 그 공간이 둘로 나뉘어진 건 순전히 인간의 자기 중심적 편협함 때문이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창세 3,6) 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걸 두고 대개 전체주의니 획일화니 하는 말로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와 획일화는 반드시 둘로,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지는 분열을 가져온다. 절대적으로 하나될 수 없다. 갈라지고 찢어진다. 왜냐. 저 혼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찢어진 데 죽음이 지배하는 건 굳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경험으로 충분히 겪어 온 게 인류의 역사다.

▲ 예수를 죽인 사람이든, 추종한 사람이든 그들 모두에게 사랑이 영원히 남으려면 그들 속에 끝없이 하나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의 사랑 개념으론 이해가 안 된다. 사랑하려고 덤벼든 게 아니라, 그냥 ‘네 멋대로 해 봐, 다 들어줄 테니’라는 식이다. 요한 복음의 육화와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모한 내어 맡김의 결정체다. 하느님의 사랑은 주고받는 애정의 교환이나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 식의 대속의 영웅적 희생이 아니다. 대개 애정의 교환은 서로의 사랑이 하나된 것으로 끝을 맺고, 희생적 죽음은 그 영웅을 기리며 모두가 흠숭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문제는 그 ‘하나’가 깨어졌거나 그 ‘흠숭’이 잊혀져 갈 때,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삶으로 회귀하고, 하나된 사랑과 영웅에 대한 기억은 각자의 삶과 거리를 두게 된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건, 이와 다르다. 전적으로 하나이되 전적으로 제 고유성이 보장되는, 생명의 확장이다.

하느님의 생명을 인간 세상에 가져다 놓고,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인간적 생을 온전히 내다 바친 게 예수다. 누구는 그런 예수를 죽였고, 누구는 그런 예수를 죽도록 추종했다. 예수를 죽인 사람이든, 추종한 사람이든 그들 모두에게 사랑이 영원히 남으려면 그들 속에 끝없이 하나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삶이나 신념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들 속에 영원한 사랑을 심는 길을 하느님은 십자가로 제시하셨다.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외아들이 사람들 손에 죽게끔 내버려 두시는 것으로, 급기야 그 외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느님은 예수를 죽인 세상과 예수를 추종하는 세상 모두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셨다.

삼위일체....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신비로 치부하는 건, 어쩌면 제 신념과 지식의 울타리 안에 갇힌 이들의 비겁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어서 너와 하나되기 싫은, 너의 고유함을 통해 내 생명의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용기를 잃은 비겁함 말이다. 내가 죽으면 신비는 일상이 되고, 내가 살려고 덤벼들며 너를 폄훼하고 폄하하는 데 익숙하면 그게 신비가 되는 건 아닐까. 성호경을 그으면서도 이 몸뚱아리의 자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나.... 애련해서 짠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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