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18일(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저 옛날 광야에서 먹던 만나에 대한 기억은 꽤나 강렬했다. 강렬한 만큼 잊혀지지 않았고, 잊혀지지 않는 만큼 세월의 흐름 속에 곱씹고 되새겼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살을 받아먹지 않은 것은 실은 지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는 기존 삶에 대한 익숙함에서 비롯된다. 익숙해진 삶이 제 삶의 본질과 하나로 인식될 때 새로움은 늘 외면된다.

돌이켜 보건대, 삶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데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는 대로 먹었고 마셨다. 먹고 마시는 일이 익숙해지기 위해선 타자, 곧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했다. 갓난아이가 의지적으로 신뢰를 가진다는 건 넌센스다. 갓난아이의 신뢰는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본질이다. 예수의 육화도 그렇다.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의 존재론적 본질이 육화 사건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는 모든 인간이 제 삶의 본질을 깨달을 때 먹고 마실 수 있다. 어머니를 향한 무모한 의탁, 바로 그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다.

▲ 삶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데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여, 예수의 성체 성혈을 받아먹고 마시기 전, 전제되어야 할 일은 시간의 더께 속에 켜켜이 쌓아 온 세속의 껍질을 벗겨 내는 용기다. 제 신념인 줄 알고 살아온 것들, 제 의지로 착각하며 되새긴 것들, 제 계획이라며 자화자찬한 오만에 대해 찬찬히 사유할 수 있는 여유다. 용기와 여유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가 될 수 있느냐의 화학적, 물리적 질문에 스스로 가둬 놓는 것이며 그로 인해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먹고 마시는 것이 있으면 먹고 마시면 그만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적당한 품위와 정갈함이 아니라 그저 먹고 마시는 단순함이다. 성체 성혈이라 감히 다가서지 못할 것처럼 칭송하는 우리의 과한 신중함이 입가에 잔뜩 음식물을 묻히며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철부지들의 단순함을 막아 세우지 않길, 오늘 하루 어린아이가 되어 보면 어떨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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