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2일(연중 제13주일) 마태 10,37-42

이번 주일에 우리가 읽는 복음서는 사명으로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주는 예수님 가르침의 최종결론이다. 이 결론은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세례 때문에 그들 모두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놀라운 말로써 예수님은 제자됨이란 그분에 대한 우선적 사랑과 선택의 고유한 관계라고 분명히 표현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결속을 자연적이고 고귀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데에 토대가 되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과 비교할 수 없다. 유대식으로 매우 뚜렷하게 표현되는 이 강력한 반대 때문에 우리는 가족 사랑과 주님 사랑의 양쪽에 있는 공통 요소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가족뿐만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예수님의 길과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10,32) 역시 그분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로운 행위이므로, 우리의 기꺼운 선택에 의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예수님의 길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제자들이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해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인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명은 다른 모든 결속들보다 가장 선행되며, 나머지 다른 결속들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명 이외의 다른 관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에 대한 충실성에 의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본래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분과의 우정과 일치, 친교를 수반한다. 그렇다면 제자됨은 모순과 당착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이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순종과 무조건적인 섬김으로 표현된다. 제자에게 이 사실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결정적 방식으로 생명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마태 10,39) 무조건적인 제자됨에 대한 예수님의 초대는 어떤 절단이나 부정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대한 충만한 깨달음과 그것과 하나되는 체험의 새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기쁨으로의 초대다.

바오로의 고전적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새로운 생명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시켜 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여정을 우리 것으로 만든다. 그분처럼 우리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로마 6,3-4) 이것이 우리의 파스카이며 우리의 여정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삶은 “하느님을 위한 삶”으로(6,10) 변화된다. 죄에 죽는 것은 이기심에, 다른 이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무능력에 죽는 것이다. 마태오는 이 맞아들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님이 보낸 사람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42)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파견되는 사람들과 일치시키는 것은 제자들의 삶에서 하느님이 최우선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것은 바로 수넴 여인이 했던 행위였다. 그는 선택된 백성에 속하지 않았으나,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 맞아들였다.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이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능력이다. 생명은 우정이며 아들의 출생일 수 있다.(2열왕 4,16)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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