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4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두려움 속에 예수는 온다. 두려움 속에 예수는 평화를 전한다. 예수가 전하는 평화는 세상의 상황 변화에 따른 결과론적 보상이 아니다. 세상 처지가 어떻든 예수는 인간 세상과 함께 한다. 예수가 이 세상과 함께하고자 하는 건, 십자를 통해서다. 부활하여 평화를 비는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의 흔적을 함께 가지고 있는 예수다.

고통과 행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극단적 대립 개념이 하나로, 한 장소에 버젓이 펼쳐지는 게 예수 부활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교가 고민해 온 새 세상의 논리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날은 주간 첫날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회당 문화와 결별한 뒤, 주일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본격적으로 기념했다. ‘주간 첫날’은 주님의 날로 기존의 세상과 다른 삶과 사상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날이다.

예언서에서 말하는 종말의 날, 곧 ‘주님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예수 부활 사건으로 가시화 되었고, 매일 매 순간이 부활한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새 세상의 시간이었다.(이사 2,11-19; 11,11; 12,1.6; 예레31,6; 에제 34,11-12; 요엘 2,1-2) 이 시간은 고통과 죽음이 제거된 안온함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로 인한 삶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요컨대 고통과 죽음의 자리도 행복할 수 있고, 생명의 활력이 넘쳐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 요한 복음에서 성령은 위로와 변호의 의미를 지닌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수가 숨을 불어넣는 장면은 예수로 인한 새 세상을 더욱 명확히 한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숨과(창세 2,7) 무너진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에제키엘의 숨에 이어(에제 37,5.9) 예수의 숨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결기와 다짐을 불러일으킨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섭리를 예수를 통해 다시 한번 깨우치고 깨우친 바를 제 삶으로 살아 내겠다는 새 세상의 시작이 예수의 숨 속에 숨겨 있다.

예수는 말한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복음에서 성령은 ‘파라클레토스’로 위로와 변호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가 지향한 새 세상, 곧 사랑에 지치지 않고, 용서에 박하지 않는, 그저 내어 주고 비워 내어 끝없는 사랑으로 가득찬 세상을 위해 신앙인들을 격려하고 부추기고 위로하는 게 요한 복음의 성령이다. 예수의 숨을 통해 성령이 내재한 신앙인은 세상의 변화나 주변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예수를 사랑하듯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태초부터 세상의 온갖 질곡 속에 함께하신 하느님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데 있다.

두려움 속에 예수는 여전히 오고 있다. 서로의 갈등 속에 예수는 여전히 죽어 가고 살아난다. 이런 세상에 신앙인이 견지해야 할 태도는 하나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5) 제 신념과 감정을 정의로 혼돈하는 어리석음에서 해방하여 서로가 누려야 할 사랑과 선함을 잃지 않는 냉정하고 건조한 마음이 성령과 함께하는 새 세상에 필요한 신앙인의 덕목이다. 제거되어야 할 수구꼴통은 없고, 찢어 죽여야 할 종북좌파는 없다. 제 의견과 다르다고 벽돌을 쌓아 막무가내로 밀쳐 내는 유치함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긴 호흡이 필요하다. 예수의 숨이 여전히 아쉽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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