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28일(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열한 제자는 경배하지만, 다른 제자 중 더러는 의심한다. “의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말 “디스타조(διστάζω)”는 불신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예수께 다가설지 “주저하는 모습”에 더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수많은 가르침과 행적들은 모두가 “교회”라는 개념 안에서 정리된다. “교회”는 예수님 당시 인간 대접받지 못했던 어린이에게도, 사회 안에서 쓸모없다고 내팽개쳐진 사람들에게도 열려있는, 그래서 늘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자리였다. (마태 18장 참조)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주저하는 것”이고, “의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관이나 신념이 행여나 타인을 밀쳐내는 데 소용되고, 흑백논리와 진영논리에 휩싸이는 편협함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그런 삶에 대해 주저하며 반성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제 일신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일이나 이웃과 사회를 제 정의와 선함으로 재단하고 단죄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이웃에, 하느님께 의탁하는 관계의 예술이다. 예수의 승천을 두고 우리는 마태오 복음의 저자가 선포한 보편적 연대와 의탁에 대해, 그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의 외침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복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또 지금껏 우리 사회는 이른바 “적폐세력”, “악의 본질”에 대해 직시하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적 식견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자신의 신념과 맞아떨어지든 아니든, 늘 건조한 마음으로 유지해야 함은 소위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의 기본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정상적 나라 운영이 그나마 정상적일 수 있게 된 요즘, 내가 가지는 희망과 기대는 서로 다른 이념의 논리적 토론이 가능하겠다는 데 있다. 서로에게 삿대질과 진영논리에 얽매인 채 적폐세력과 싸워온 지난한 시간들 때문인지, 옳고 그름을 식별하자는 "비판적 자세"에 경기를 일으키며 내 편, 네 편으로 또다시 갈라치는 이 시대 정의의 투사들이 회개하여 서로의 말의 진의에 찬찬히 다가설 수 있는 여유 역시 문재인 정권으로 가능하겠다는 설렘 또한 크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이런 기대와 희망에 발맞춰 몇 가지 조심해야 할 태도가 있다. 간혹, 지식인, 작가, 혹은 정의의 투사라는 탈을 쓰고 글로써 말로써 행동으로써 굳이 편을 갈라놓으며 제 지향과 의지, 혹은 제 결핍과 잘못을 진영논리로 희석하는 편협한 태도다. 이를테면, 다른 주장이나 가치관에 맞서 제 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넌 촛불 들어 봤니?”, “넌 밀양, 강정, 쌍용차, 세월호에 함께 해 봤니?”라는 “소박한(?)” 자랑질과 “이명박근혜”를 물리쳤다는 객기를 정의라며 떠드는 “빠”들과, 제 지지자에 대한 비판적 견제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제 삶의 자리 역시 그 비판적 견제와 조언으로 꾸며가는 진정한 지지자 사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적 편협함에 짓눌린 태도다. 적으로 돌려세울 대상이 있어야만, 때론 제 고귀한 자비를 실천할 대상이 있어야만 제 정의를 살아가는 듯 외치는 이 시대의 거짓 지식인과 정의의 투사들은 실은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마저 불러일으킨다.

비판적 식별력을 상실하여 지지를 선동으로 끌고 가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제 자존의 결핍은 또 다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보듬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들어주어야 할 형제애적 숙제다. 우리는 모두 정의에, 진리에 얼마간 ‘주저한다.’ 정의를 목놓아 외치다가도 제 밥그릇을 두고 주저하고, 악의 본질을 꽤나 논리적으로 따져 묻지만 제 삶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엔 소홀한 게 인간이다. 주저하지만, 바로 이런 인간을 통해 하느님이신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가르친다. 서로 모나고 부족해서, 비판적이고 건조한 마음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식별력을 갖추는 데, 우리의 에너지는 소모되어야 한다. 모두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갈 형제요 자매다. 하여,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아 가르칠 우선 과제는 지식이나 이념의 주입이 아니라, 네 편 내 편 가르는 "완고한 감정놀이"에서의 해방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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