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요즘에는 잘 쓰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전을 참고하면 천주교 용어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가 사말(四末)이라는 개념입니다. 얼마 전에 늦장가를 간 후배가 종종 교회용어에 관해서 질문을 해 오는데 이번에는 사말에 대해서 물어왔습니다.

저도 솔직히 낯선 낱말이라 '한 말 두 말 세 말 네 말'하며 우스갯소리를 해 봤지만, 본뜻은 "사람이 피하지 못할 죽음, 심판, 천당, 지옥" 이 네 가지 종말을 가리킵니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참조). "천주교 요리문답"에서 앞의 네 문제를 사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가톨릭대사전 참조)

영어로도 the Four Last Things, 라틴어로는 Quattuor Novissima입니다. Novissima는 요즘 표현으로 치자면 '완전 새로운', 그러니까 '가장 나중에 온' 것의 복수형입니다. 가장 나중에 오는 네 가지(Quattuor)인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각에서는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만나는 것이지만, 영원의 삶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면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을 희망하고 맞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은 죽음을 거둬 내셨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이야 누구든지 맞는 것이지만, 죽음에 이어서 오는 심판에서 천당과 지옥이 갈릴 테니 어디로 판결이 날지 떨리거나 두렵기도 할 것입니다. 심판은 개인의 죽음 이후에 이뤄지는 '개별 심판' (또는 사심판)과 세상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또는 공심판)으로 구분됩니다.(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죽음, 심판, 지옥, 천국 - 가톨릭교회의 사말 교리", 23쪽 참조)

개별 심판은 상선벌악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 전통적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개별 심판이 개인의 선행과 악행을 검토함으로써 이루어진다면, 최후 심판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쳐 주셨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37)라는 계명과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곧, 곤경에 놓인 이웃들을 향한 자비의 실천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직후에 하느님 앞에서 그 삶의 행실에 따라 즉각 심판(개별 심판)을 받게 되다면, 최후 심판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앞의 책 24-26쪽 참조)

▲ '사말-죽음, 심판, 천당, 지옥', 마르텐 반 헤스케르크. (1565)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가톨릭교회는 최후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두려움과 공포의 메시지가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향해서 회심하라고 자비로이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의 재림 곧 심판의 날이 더욱 기다려질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을 테니 말입니다.

심판을 받고 나서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지상의 삶에서 충분히 보속을 하지 않은 상태라면 연옥에서 정화의 기간을 거쳐서 천국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일치하게 됩니다. 이처럼 연옥은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정화이며 단죄받은 이들이 지옥에서 받는 벌과는 다른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31항 참조)

지옥은 흔히, "영원한 불"로 그려집니다. 다른 측면에서 지옥을 이해하자면, 이 공간은 하느님과 단죄받은 이가 철저하게 단절된 곳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완전히 단절된 관계는 그가 지옥에 왔기에 갑자기 벌어졌다기보다는 지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을 저질렀어도 회심의 기회는 여러 번 있었을 것이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순간들에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고 살았던 이가 있다면, 그는 이처럼 지옥에서도 그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지옥이 있을 수 있는가? 문제제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인생을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아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닌 피조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지옥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반증이 됩니다.

천국은 지옥과는 정반대의 공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한 이들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영원한 기쁨 안에 일치하는 곳이니까요.

사말에 관한 개념과 그 교리는 믿는 이들이 현세에서 열심히 사랑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더 열심히 사랑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사명입니다. 비록 내가 좀 흠 있는 삶을 살았다 해도 여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헌신했다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 연옥의 정화를 거쳐서라도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희망이 현세의 삶을 더 열심히 살도록 이끌고,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