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참사 3년 기획 3] 세월호 약속지킴이 오영주 씨 인터뷰

세월호참사 이후 3년. 믿기지 않는 날들이다. 1년째, 2년째 날을 보내며 “아직도....”라고 절망하다가도 기어이 기억하자며 걸어온 날들. 마침내 3주기를 눈앞에 두고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지난 3년간, 세월호와 함께한 이들이 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로 인한 2차 피해자들, 진상규명을 위해 오롯이 달려온 이들, 가족과 세월호 광장을 지킨 이들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세월호참사 3년과 선체 인양에 즈음해 세월호와 함께했던 이들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글 싣는 순서

1. “국가는 구멍가게만도 못했다” - 세월호 잠수사 공우영 씨
2. “나는 아직도 특조위 조사관입니다” - 특조위 김성훈 조사관
3. “산 자로서 기워 갚아야 할 몫이 있어요” - 세월호 약속지킴이 오영주 씨

“지금도 매일 2014년 4월 16일을 살아 내고 있을 가족들의 살 녹는 고통을 생각하면, 내 심장도 같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정권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촛불이 켜지고 탄핵, 그리고 세월호 인양.... 신앙인인 내 눈에는 이 모든게 신비고 함께하심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피조물인 우리 머리로 판단하고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만은 그분이 손수 움직이셨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난 3년 우리의 정직한 고단함에 그분이 함께하셨음을....”

세월호 지킴이, 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 회원 오영주 씨(율리안나).

그는 인양 후, 자신의 SNS에 이렇게 적었다. 세월호참사 이전에는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가 이 정도라는 것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그는, 이제 세월호와 함께 숱한 현장의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날은 세월호참사 3년 추모 일정에 따라 ‘세월호 약속 지킴이’로 광화문 분향소를 지키러 나온 참이었다. 마침 그날은 각 정당 대선후보들이 ‘안전사회’를 위한 정책을 약속하는 날이라, 분향소를 찾은 대선 후보들을 만나게 됐다.

그는 분향소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그들을 보며, “이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잘 할거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 세월호 약속 지킴이로,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오영주 씨. 그는 여전히 사진 속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정현진 기자

3년 전 4월 16일의 사건을 두고 오영주 씨는 “전 생애 중 가장 큰 충격”이라고 표현했다. 단원고 희생자들 또래의 자식을 둔 엄마로서 가족들의 울부짖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300명이 넘는 생명이 고스란히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 봐야만 했던 절망에 몇날 며칠을 신음하고 분노하다 그는, “이건 이전의 사고, 재난과 전혀 다른 일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마 가족들을 만나거나 광장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큰 아픔을 대면하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러다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가족을 위로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미사와 단식 기도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그는 용기를 내 광장을 찾고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국가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국가가 이렇게 망가지는 동안 내가 가만히 있었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죽었다고. 그러니 뭐라도 해야 했어요. 우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내 일을 하는 거죠. 그런데 빚을 갚기 위해 온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고 배우기 시작하는 거에요.”

세월호 약속지킴이, 국민조사위 조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과 같은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 전에는 1인 시위나 피켓 시위 같은 건 해 보지도 않았던 사람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생업과 학업을 미루고 어디에서든 뭐라도 하려는 이들. 오 씨는 그 모든 이들과 함께한 지난 3년이 마치 하루와 같다고 했다. 세월호를 지키려는 이들의 마음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도 모두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처음과 같다.

▲ 2014년에 진행된 세월호 가족 동조 단식 기도회. ⓒ정현진 기자

“기적도, 치유도 먼저 찾아가 손수 행하신 예수가 광장에 있었다.”
더 많은 이들이 현장에 와서 보고, 듣고, 깨닫고 행하기를 바라는 마음....

오영주 씨의 지난 3년은 또한 교회와 함께였다.

사실 그는 세월호 광장 미사에 참석하기 전, 대한문 앞에서 사제단이 쌍용차 해고자들을 위한 미사를 해 왔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마음에는 “교회가 복음을 외면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가 읽는 복음에서 예수는 항상 직접 찾아가고 직접 기적을 행하고 치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늘 신자들에게 기도하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만 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하는 그의 눈에 천막도 없이 맨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제, 신자들이 들어왔다. 아픈 이들을 찾아가 곁을 지키는 예수, 교회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광장에서는 늘 어떤 행동이나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믿는 이들의 역동성이 있었다. 오영주 씨는 그 안에서 자신의 신앙도 충만해졌다고 고백했다. 그가 다니는 본당에서도 변화를 본다. 그 전에는 혼자 광장, 현장으로 나서는 그가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그는, “그래도 요즘은 기도 지향을 현장에 두려고 하고, 미사에도 함께 나가기도 한다”며, 공동체의 마음이 열린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당 공동체의 변화에는 사제의 몫이 크다고 본다. 사제 중심의 교회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선도 있지만, 그런 분위기라면 사제가 어떤 삶을 가르치고 보여 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신자, 수도자도 마찬가지며, 중심축이 어디냐가 아니라 각자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보여주고 또 배우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선관위에서 운영하는 참관인 활동을 할 예정이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정권교체가 중요한 만큼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자는 다짐이다.

▲ 오영주 씨는 국민조사위원회 시민 연구원으로도 활동한다. (사진 제공 = 오영주)

오영주 씨는 세월호 이전에는 여러 현장이나 지역에서 천막을 치고 싸우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어느 사업장이나 동네에 누군가 천막을 치면 그 안에 있는 이들이 어떤 형편인지 왜 그러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예수는 ‘와서 보라’고 했다. 나 역시 가서 보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됐고, 다른 이들의 형편도 헤아리게 됐다”며, “잘 모른다는 이들, 더 많은 시민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느끼고 그러면서 뭔가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할 일을 할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을 이 자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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