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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구멍가게만도 못했다”[세월호참사 3년 기획 1] 민간잠수사 공우영 씨 인터뷰

세월호참사 이후 3년. 믿기지 않는 날들이다. 1년째, 2년째 날을 보내며 “아직도....”라고 절망하다가도 기어이 기억하자며 걸어온 날들. 마침내 3주기를 눈앞에 두고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지난 3년간, 세월호와 함께한 이들이 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로 인한 2차 피해자들, 진상규명을 위해 오롯이 달려온 이들, 가족과 세월호 광장을 지킨 이들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세월호참사 3년과 선체 인양에 즈음해 세월호와 함께했던 이들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글 싣는 순서

1. “국가는 구멍가게만도 못했다” - 세월호 잠수사 공우영 씨
2. “나는 아직도 특조위 조사관입니다” - 특조위 김성훈 조사관
3. “산 자로서 기워 갚아야 할 몫이 있어요” - 세월호 약속지킴이 오영주 씨


“기쁠 일도 아니고, 왜 내가 이래야 하는지 그 생각만....”

세월호참사 직후 민간잠수사로 희생자 수습을 감독했던 공우영 씨. 그는 2014년 9월 검찰로부터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고발당했다. 재판은 대법까지 이어졌고 올해 1월 30일 대법은 공우영 씨에게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검찰의 고발 이유는 “잠수사 관리 소홀”이었다. 희생자 수습이 한창 이뤄지던 2014년 5월 6일 잠수사 이광욱 씨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해경은 그 책임을 당시 감독관 역할을 했던 공우영 씨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이광욱 씨와 공우영 씨가 같은 회사 소속이었으며, 공우영 씨가 민간잠수사들을 고용했다는 해경과 검찰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잠수사 관리 최종 책임자는 해경이었고, 잠수사들을 추가로 채용한 것도, 박근혜 대통령 방문 직전 숫자를 채우라는 해경 윗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꼬박 27개월, 재판에 끌려다니면서 공우영 씨는 생활 기반도 잃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재판을 받아야 하니, 정기적인 일을 할 수도, 해외에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무죄판결이 났지만, 고 씨는 “기뻐할 일도 아니다. 도대체 왜 나를 기소했나. 우리는 정부와 해경이 하지 않는 일을 대신 한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는 참사 직후 언딘 측의 인양 참여 요청에 따라 참사 현장으로 내려갔다. 해군 해난구조대(SSU) 출신인 그는 잠수를 업으로 삼으며 크고 작은 인양과 수습을 해 왔고, 천안함도 인양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상황이 바뀌었다. 여전히 배 안에 사람들이 있었고, 인양보다는 구조와 수습이 먼저였다. 이왕 왔으니 수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장비를 준비하고 4월 21일 현장에 들어갔다. 공우영 씨는 “현장에 갔더니, 해경은 아무도 물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전쟁터 같았다”며, “당시 민간잠수사가 6-7명 있었는데, 해경은 배 위에 있고, 잠수사들만 물때에 맞춰 계속 들여보내고 있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 공우영 씨는 당시 사진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현실에, "화를 내면 뭐 하겠느냐. 이게 내 복"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정현진 기자

나이가 많았던 그는 민간잠수사들의 작업을 지휘했고, 인원이 부족하자 해경 가운데 SSU 후배들을 불러 보조작업을 요청했다. 그는, “언딘도 해경도 싸잡아 욕을 많이 먹었지만, 현장에 있던 직원들, 말단 경찰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잠수사들의 식사를 준비해 나르고 뒷바라지를 한 것도 모두 언딘 직원이었다. 문제는 윗선들이었다. 지금도 화가 난다”고 했다.

“수심이 46미터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물에 하루 2번밖에 못 들어가요. 그런데 우리는 4-5번을 들어갔지. 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사람은 없는데, 밖에서 가족들은 기다리고. 나도 자식을 키우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도 다른 잠수사들 모두 위험한 줄 알면서도 들어갔지. 아파도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고마워요.”

공우영 씨는 당시 동료, 후배들이 얼마나 진심을 다했는지 말하고 싶어 했다.

“물속에서 잠수사들이 끙끙대는 거에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서로 엉키고 시설물에 끼어 있어서 도저히 꺼낼 수가 없다는거에요. 물건 같으면 그냥 힘을 쓰면 되지만, 사람인데 그러면 상하잖아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데려다줄 테니 집에 가자고 달래 보라고 했어요. 그러면 정말 거짓말처럼 나와요. 나도 놀랐어요. 이런 간절함이 정말 힘이 있나 보다.”

공 씨는 “매일 우리가 모여서 다짐한 건, 모두 우리 가족처럼 다뤄라. 절대 시신에 상처가 가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면서, “그런데.... 정작 정부 관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한다. 모든 걸 감추기 바빴다”고 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배 속에서 사람들을 데려왔던 잠수사들은 결국 강제로 7월 10일에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참했다. 작업 도중 병을 얻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일부 경우에만 치료비만 지원받을 수 있을 뿐이다. 몸보다도 심적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고 작업 중에도 그 뒤에도 동료를 잃기도 했지만 정부는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공우영 씨는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닌가 보다”고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때 만난 잠수사 중에는 고 김관홍 잠수사도 있었다. 공 씨는 그를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했던 후배로 기억한다. 물속에서 작업을 하다가 급속도로 몸이 안 좋아진 김관홍 씨에게 의사는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다 고생하는데 잠수를 하지 못하더라도 호스라도 잡아야겠다”며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공우영 씨는 “관홍이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는데, 왜? 라는 생각만 나고, 믿을 수가 없더라”며, “같이 고생했던 이들이 자꾸 힘들고 그렇게 되니까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 시신 수습을 위해 잠수를 준비하는 민간 잠수사들. (사진 제공 = 공우영)

당시 수습에 나섰던 민간인 잠수사들은 여러 증상과 병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병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업체에서 부르지 않아 생계도 곤란을 겪는다. 하지만 정부는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조차 인색하다.

치료비 지원 기준도 현실성이 없어 잠수로 인한 대표적인 병이 골괴사지만, 이는 지원에 포함되지 않는다. 보상금은 25명에 대해 4억 6000만 원 정도가 지급됐지만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는 치료기간과 비용, 생계 문제 등을 따지면 턱없이 부족하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잠수사들을 피해 보상자에 포함시키는 법을 발의했지만 통과는 요원하다. 신체 질병뿐 아니라 물속에서 수습을 했던 잠수사들은 심적 트라우마도 상당하지만 그나마 받았던 심리치료도 정부가 아닌 특조위를 통해 이뤄졌다.

공우영 씨는, “우리가 무슨 돈을 벌려고, 보상을 바라고 일한 것이 아니다. 다만 몸이 아픈 사람들만이라도 산재 수준에서 해결해 달라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보상이나 지원 기준조차 마련해 주지 않는다. 정부가 동네 구멍가게 수준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억울함 때문이었다. 당시 그렇게 일하는 잠수사들을 대상으로 비난과 유언비어가 쏟아졌다. 시신을 숨겼다가 내놓는다고 하고, 심지어 당시 청와대 대변인 민경욱은 “민간잠수사가 일당 100만 원, 시신 1구 수습시 50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공 씨는 “시신을 숨길 시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았을 것이다. 정부 대신 일하는 우리가 설사 돈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됐다”며, “가족들도 펄펄 뛰었고 정말 후회됐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라온 세월호를 보면서도 안타깝고 할 말이 많다. 인양을 수십 번 해 본 사람으로서, “처음부터 왜 지금의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작년에 올라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처음에 잘못된 방법이라고 지적된 것을 정부가 고수했고, 나중엔 배 무게 계산도 잘못 하더라. 수습부터 인양까지 정부는 늘 대책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 현장에서 수습 계획을 설명하는 공우영 잠수사. (사진 제공 = 공우영)

그는 현장경험자로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우선시할 것과 그들의 지휘력을 인정해 주라는 것이다. 공 씨는 당시 현장에서 대통령이 온다며 잠수사들을 들러리 세웠던 일을 잊지 못한다. 한시라도 급하게 수습해야 할 시간에 정부와 해경은 대통령과 악수하는 의전이 중요했다. 그에 반발해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돌아간 뒤,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찍힌 ‘잠수사’는 진짜 잠수사들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911테러 때, 내가 TV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이 있어요. 소방대장이 무전기를 들고 지시하는 동안, 대통령이 옆에서 한마디도 못 하고 지켜보고만 있더라고. 그런데 우리는 그 다급한 현장에서 지휘는커녕 대통령 만나서 대답하느라 일을 못해요. 관료주의가 최고의 폐단이에요.”

그는 사고 수습 주체가 해경, 해수부였는데, 그 사람들은 현장을 모른다며, “정작 현장을 아는 사람들은 권한이 없다. 계급, 지위가 우선”이라면서, “배에 들어가고, 도면 보고 연구하고 현장을 겪어 본 우리가 더 잘 안다. 그런데 윗사람들이라고 구두 보고를 듣고 지시한다. 정말 후진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차기 정권에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제발 먼저 찾아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며,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제대로 사태 파악을 할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당시 현장에서 함께했던 잠수사들. 맨 뒷줄 가운데 정면을 바라보는 이가 고 김관홍 잠수사다. (사진 제공 = 공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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