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참사 3년 기획 2]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김성훈 전 조사관 인터뷰

세월호참사 이후 3년. 믿기지 않는 날들이다. 1년째, 2년째 날을 보내며 “아직도....”라고 절망하다가도 기어이 기억하자며 걸어온 날들. 마침내 3주기를 눈앞에 두고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지난 3년간, 세월호와 함께한 이들이 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로 인한 2차 피해자들, 진상규명을 위해 오롯이 달려온 이들, 가족과 세월호 광장을 지킨 이들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세월호참사 3년과 선체 인양에 즈음해 세월호와 함께했던 이들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글 싣는 순서

1. “국가는 구멍가게만도 못했다” - 세월호 잠수사 공우영 씨
2. “나는 아직도 특조위 조사관입니다” - 특조위 김성훈 조사관
3. “산 자로서 기워 갚아야 할 몫이 있어요” - 세월호 약속지킴이 오영주 씨

▲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김성훈 전 조사관. ⓒ정현진 기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2과 김성훈 전 조사관.

그는 지난해 6월 말, 특조위가 강제 종료된 뒤에도 아직 남아 조사 활동을 하고 있는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직 ‘조사관’으로 남은 이들은 국민조사위원회와 선체조사위원회, 세월호가족, 그리고 1기 특조위와 2기 특조위 사이의 연결고리와 같다.

민간 연구소 경제분야 연구원으로 세월호참사 직후 정부와 해경의 참사 대응 문제, 참사를 둘러싼 사회구조적 문제를 연구하던 중 특조위 조사관으로 채용됐다. 지난해 6월 말, 특조위 강제 종료와 9월 말 강제 해산을 겪으면서 10개월째 조사 활동을 놓지 못하고 있는 그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탔고, 호랑이는 멈추지 않고 뛰어내릴 수도 없다. 놓을 수 없게 됐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1기 특조위가 업무를 시작한 것은 2015년 7월 말. 그러나 실질적으로 준비가 끝나고 본격 조사활동은 1차 청문회가 끝난 뒤인 2016년 1월부터다. 강제 종료된 6월 말까지 6개월 남짓한 기간 특조위에 접수된 조사 사건은 230여 건, 조사관 1인당 맡겨진 조사 건수는 약 20건이었다. 짧은 활동 기간, 수사권 제한, 정부의 특조위 불온시, 파견 공무원들의 집요한 방해 등 수많은 난관을 겪으며 조사관들은 3차 청문회까지 치렀고, 230여 사건 중에서 4건의 보고서를 냈다.

김성훈 씨는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조사관들의 책임감과 의무감은 상당히 높았고, 격무에도 각자 알아서 버텼던 시간이었다며, “9월 말 강제 폐쇄가 분명해진 시점에 조사관들이 모여서 마지막으로 결의한 것은 최대한 많이 남아서 이후를 대비하고 조사활동을 이어 가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와 동료들은 현재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 계획 마련, 세월호 가족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인양된 선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사할 것인지 계획을 마련하고 선체조사위에 효과적으로 반영되도록 노력한다.

그는 “선체조사위와 우리 조사관들은 기본적으로 관심 방향이 다르다. 학계 전문가가 많다 보니 선체조사위는 배 자체 조사에 주력하지만, 그것은 기초 조사에 불과하다”며, “선체 조사를 바탕으로 다음 조사로 나가야 한다. 사고 원인은 복합적이고,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제한된 시간과 인력에도 전체 맥락을 파악한다는 문제의식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조사관들도 가족을 대신한 언론대응에 나서고, 자료 지원에 나선다. 인양이 됐지만 가족들은 더 힘든 상황이 됐다. 정치권과 해수부는 여전히 3년 전의 무능과 뻔뻔함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탓에 가족들은 직접 요청이나 항의도 조심스러운 형편이다.

▲ 지난해 9월 세월호 특조위 3차 청문회. ⓒ정현진 기자

특조위 청문회의 성과? 검찰이 그만큼도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밝힌 것

1기 특조위에 대한 안팎의 평가가 있겠지만, 열악한 조건에서도 3차까지 청문회를 치렀고, 상당한 사실을 드러냈다.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성훈 씨는 “성과가 있다면 그만큼 검찰에서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 진상규명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린 것이었다”며, “3차 청문회는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3차 청문회 내용은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자료를 받아서 밝힐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검찰의 조사, 진상규명 실패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라며, “청문회를 하자고 했던 것은, 검찰의 직무유기, 청와대의 덮으려는 시도를 알리는 것이었고, 진상규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국민들이 세월호참사에 매 순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진상규명의 목적과 책임자 처벌의 필요성입니다. 지금 대선 후보들이 안전사회를 위한 공약을 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책임자들이 당시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밝히지 못하면 결국 비현실적인 뜬구름, 기존 정책의 반복일 뿐이에요.”

진상규명의 중요성에 대해 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재난과 참사의 예방 그리고 사후 대응을 위해서는 세월호참사의 책임 기관과 관련자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힐 때에만 정확한 대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전사회 실현의 첫걸음은 진상규명이라면서, “진상규명 없이는 반복과 퇴행만 있을 뿐이다. 진상규명의 목적을 잊지 말고, 지겹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조사관이 아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지난 3년간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정부와 공무원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는 지난 3년간 오히려 퇴행해 왔다”며, “국정농단을 시작으로 탄핵을 거쳐 대선까지 왔지만, 그 모든 일의 전조는 세월호참사였다. 대선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은 관심이 없다. 정권교체 뒤 진상규명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 지난해 10월 이석태 특조위 위원장(가운데)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강제 해산을 절대 수용할 수 없으며, 새로운 활동을 이어 가겠다"고 선언했다. ⓒ강한기자

해경과 해군, 청와대 간 교신기록을 얻기 위해 한 달 농성, 잊을 수 없어

그에게 조사관으로서 잊을 수 없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끝까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해경 본청에 남아 있는 교신 내용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서 조사관들이 한 달간 농성 아닌 농성을 했던 일이라고 했다.

3차 청문회에서 다뤘던 해경 본청의 교신 기록은 해경과 해군 그리고 청와대 사이의 무전과 내부망 교신, 핫라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의 중요성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찰에 압수수색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김성훈 씨는 “이 기록만 분석하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서면 보고, 증인 진술을 모두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교신은 가장 정확한 증거”라면서, “정권이 바뀌고 2기 특조위가 없더라도 특검만 의결되면 이것부터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는 아직도 세월호참사를 덮으려고 하고, 지금도 덮고 있어요. 하지만 국민들이 그것에 동의하면 안 됩니다. 덮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사회가 바뀔 것이고, 이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에요.”

국정농단을 밝히고 탄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세월호참사의 진실도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그는 “진상규명은 지난하고 철저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나 5.18, 4.3처럼 과거사로 묻힐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훈 씨는 5.18민주화운동을 예로 들었다. 그는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고, 다른 과거사도 마찬가지라면서, “적당히 드러내고 구체적 사실을 덮어버리는 순간, 세월호참사도 규명되지 않은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세월호참사의 가장 중요한 증거 중 하나는 희생자들의 휴대폰, 화물차 블랙박스 기록이고 지금 기술로는 복구할 수 없어도 훗날에는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큰 그림이 나왔다고 해서 절대 끝이 아니다.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된다. 시민들은 얼마의 시간이 들더라도 이 지난한 작업을 철저하게 마쳐야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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