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3월 26일(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유대 사회의 속담 중에 ‘아비가 신 포도주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라는 말이 있다.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전해진다는 말인데, 성경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에제 18,2) 한때 ‘가계 치유’라는 이름으로 신앙인들의 현실적 고통을 조상들 탓으로 돌리는 황당한 가르침이 횡행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간헐적으로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웃의 아픔을 죄로 단정하고 그 죄의 탓이 누구에게 있는지 굳이 따져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완고함이 빚어낸 신앙적 참극이다.

예수는 태생 소경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찾는다. 사람들이 단죄하고 밀쳐 댄 태생 소경의 자리는 그 부모마저 외면하는 자리였다.(9,21-22. 90년의 얌니아 종교회의 이후, 유대 사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갈라져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대개 오늘 복음을 두고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완고함을 질타하며 예수가 누군지 제대로 볼 수 있는 신앙적 혜안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끔씩 복음을 해석할 때, 우린 너무나 순진하거나 아니면 무모한 경우가 많다. 한번 훑어보면 알 만한 예수의 가르침에 바리사이들이 그리 완고한 태도를 보인 것이 무식해서인가, 아니면 정말 볼 줄 모르고 들을 줄 모를 만큼 앞뒤가 꽉 막힌 폐쇄적 인간들이기 때문인가....

▲ '맹인을 치료하다', 두초.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이해하지 않으려 덤벼드는 건, 순전히 개인적 신념이나 신앙으론 불가능하다. 인간은 얼마간의 이해관계 안에서 움직이고 주장하며 저항하거나 타협한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놀랍고 신기했으나 바리사이와 태생 소경의 부모는 제 삶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 체제가 주는 안전함을 잃기 싫었을 뿐이다. 그들은 무식하거나 못 보는 게 아니라 안 보는 척, 안 보아야 하는 시대의 당위 앞에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가 누군지 묻기 전에, 제 삶의 처지가 정의로운지, 자비로운지, 혹은 비겁하거나 굴종적인지 먼저 되돌아보자. 자식마저 자본주의의 처참한 경쟁에 내맡긴 채, 세상을 사랑하러 목숨까지 바친 예수를 믿는다며 기도하는 건, 꽤나 우스운 일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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