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3월 12일(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예수가 산에 오른다. 산은 마태오 복음에 있어 특별하다. 산에서 예수는 가르쳤고,(마태 5,1) 산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파견하며 자신이 가르친 바가 널리 퍼져 나가길 바랐다.(마태 28,16; 4,8) 전통적으로 ‘산’의 형상은 신적 현현의 자리이기도 했다. 예수는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서 가르쳤고, 가르치는 대로 세상이 하느님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길 원했다. 산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조우하는 자리였다.

모세와 엘리야가 산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일치를 이루어 내어야 한다는 구세사의 흐름에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다. 모세와 엘리야는 마지막 때에 메시아의 등장을 암시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2열왕 2,1-17; 말라 3,23-24) 요컨대 예수는 메시아며 마지막 때에 펼쳐질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베드로는 아직 이러한 완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완성이 아닌 과정의 자리에 머물고 만다. 가나안 복지에 ‘아직’ 당도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떠돌았고,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신명 16,13)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하나는 예수에게 제공하겠다는 베드로의 의지는 ‘아직’ 광야에 머문다. ‘아직’ 가나안 복지에 이르지 못했다.

▲ '예수의 변모', 아르만도 알렘다르 아라. (2004)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구름이 일고 모든 게 감추어져 버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말씀 하나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다.(3,17) 시편 2,7의 말씀에서 유래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구약 전통에서 천사들, 판관들, 혹은 의인들, 임금들을 가리켰고, 묵시문학에선 참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도 했다.(희년서 1,24)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이들을 가리켰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구원의 완성으로 마무리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구원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산다. 더 많이 이루어야 하고, 더 많이 거룩해야 하고, 더 많이 깨끗해야 한다고 외친 결과가 ‘박근혜’고 ‘최순실’이며 ‘이재용’이다. 태극기를 들고 ‘아직’ 더 짓고 더 개발해야 하고, 더 활동해야 한다는 거짓 배고픔을 이유로 억울한 희생과 불의를 적당히 눈감아 왔던 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저로 복귀하면서 웃고 울었다 한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말했다 한다. 제발 진실이 밝혀지길, 그래서 박정희의 망령으로 시작된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자리에서 울며 아파하던 이들이 웃을 수 있길, 웃으며 제 뱃속을 채우기 위해 ‘아직’ 멀었다며 선량한 백성을 짓밟은 이들이 진정으로 울게 되길.... 그리하여 이제 비로소 대한민국이 그 완성의 얼굴을 다시 찾았음을 고백하길.... 적어도 하늘 나라의 완성된 나라에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갈망해야 할 시대 정신이 아닐까. 더 이상 무엇을 짓고 허물어야 할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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