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3월 19일(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자메 티소.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대개 인식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것으로 이야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물론 요한 2장부터 예수의 메시아성을 짚어 왔고 요한 복음 전반부는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온 예수에 대해 믿음의 유무에 대해 집중한다.

믿음은 알고자 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순명하고 따르는 행위로 인식한다. 그러나 기존의 앎의 체계 안에 받아들여지는 믿음의 대상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기보다는 존재하기를 바라는 믿는 이의 욕망이 투사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욕망의 투사가 믿음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단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믿음이란 건 본디 그러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있어야 대상이 생기고 그 바람 안에는 얼마 간의 개인적 욕망을 담아내기 마련이니까.

믿음이 순도 100퍼센트로 달구어진 타 존재에 대한 의탁이 될 수 없다는 데 동의를 한다면,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여인보다 예수의 모습이 믿음을 제대로 보여 준다. 유대 남자 예수가 사람 취급 못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가섰다는 사실, 여기에 믿음의 참된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는 사회, 문화, 관습, 종교의 핑계로 차별과 부조리,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을 뛰어넘고 있다. 물을 달라면서 시작된 대화는 예수가 이끌고 여인은 따라가는 형국이다. 야곱의 우물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하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리가 가리짐 산만이 아님을 깨치게 하는 예수, 그의 뒤를 따르다 보면 어느새 유대 사회가 외면한 사마리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믿음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핑계가 아니라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용기다. 현실 너머에서 제 앎의 체계가 무너지고 고쳐져 다시 세워지는 지난한 여정이 믿음이다. 현실 속에 매몰돼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건, 너무나 알고 있다는 교만이거나 낯선 것을 허용하지 않는 무지 혹은 비겁함의 결과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늘 새롭게 살아 움직이시며 다가오신다. 그럼에도 나의 믿음은 쌍팔 년도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삶의 ‘지금’을 찬찬히 사유하고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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