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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리병 안에 보존된 소녀의 장미[어린이처럼 - 영화 '미녀와 야수']
김유진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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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17  14: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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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녀들은 어떤 사랑을 꿈꿀까. 백마를 타고, 유리 구두를 신겨 주는 왕자와의 운명적 만남과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는 않을 듯하다. 디즈니의 1세대 공주인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그걸 아는 디즈니는 이미 20년 전부터 '뮬란', '라푼젤, '겨울왕국'에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새로운 공주상을 만들어 냈다.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는 만인의 연인이 될 법한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엘사는 제어되고 규정되지 않는 자신의 힘과 정체성을 왕자가 아닌 동생 안나의 사랑으로 찾아 나간다.

   
▲ '미녀와 야수', 빌 콘돈, 2017. (이미지 제공 = 올댓시네마)
1991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미녀와 야수'는 그러한 변화의 시작점에 있는 작품이었다. 왕자가 나를 죽음에서 혹은 삶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걸린 야수를 내가 왕자로 되돌려 구원해 주는 것. 물론 평민 여성인 벨이 성의 주인인 왕자와 만나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되는 점에서는 기존 판타지와 다를 바 없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26년 만에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 되어 개봉한 '미녀와 야수'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듯하다. 애니메이션이 실사로 재현된 모양새도 우선 궁금하고 오늘날에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느껴질지 직접 확인하고도 싶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선언하고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서는 엠마 왓슨이 여주인공 벨을 연기했기에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똑똑한 소녀 캐릭터 헤르미온느 역할을 했던 그녀가 벨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새로움과 한계를 어떻게 짊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건 벨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초이자 악인 가스통의 친구 르푸에게 동성애 코드를 첨가한 정도였다. 벨은 자신의 상징인 노란 드레스만큼이나 생동감을 지닌 진취적인 캐릭터인 건 분명했지만 왕자와 사랑을 이루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화해하는 해피엔딩은 오랜 옛날의 전래 동화이지 오늘날 판타지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모티브는 결국 벨과 야수, 남녀의 사랑이다. 여전히 세상 모든 예술과 미디어는 사랑을 예찬한다. 낭만적 사랑의 종말과 허구를 안다면 이 사랑에 감동하기 어려울 텐데도 말이다.

대개의 경우 사랑을 할수록 알게 되는 건 처음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랑을 하면 언젠가는 사랑이 사라진다는 사실만큼 고통스러운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래서 여러 번의 사랑을, 혹은 오랜 사랑을 해 온 ‘어른’들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장미를 유리병 안에 보존해 둔다 해도 장미 꽃잎은 결국 하나씩 떨어질 거라는 걸 그들은 안다. 그때 시들어 버린 장미를 두고 새 장미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새 장미는 시들지 않을 거라 믿으며, 아니, 새 장미 역시 언젠가는 시들 걸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늘 새 장미만을 곁에 두고 보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이 길들인 장미에 책임을 두는 건 어린왕자의 별에서나 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장미.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신자유주의 속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일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드니 사랑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사랑과 연애 역시 철저하게 교환 가치로 저울질한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 또한 사랑의 장애로, 일부 젊은 여성들은 ‘한남’(한국 남자)이 같이 사랑을 가꾸어 갈 만한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랑을 수행하는 게 전부라 알고 있다. 낭만적 사랑이 점차 사라져 가는 시대에 대한 교회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의 규범은 낭만적 사랑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나.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사랑의 사명을 낭만적 사랑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낭만적 사랑의 지극히 인간적인 성격, 즉 빛과 어둠, 죄악과 선함을 오가는 감정의 격랑을 순연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수렴하기는 힘들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장미는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면 수많은 장미를 주신 까닭은 무엇인지, 장미는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유진(가타리나)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그전에는 <가톨릭신문> 기자였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신앙의 두 여정이 잘 만나길 바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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