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19일(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논리적인 게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 다분히 논리적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되고, 원수로 해코지 하는 이가 있으면 상종을 하지 않는 게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다.

예수는 인간 세상의 논리 너머에서 정의를 말하는 듯하다. 흑백 논리, 선악의 구별, 보수와 진보, 정의와 불의의 대립 구도를 예수는 분명 거부한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을 돌려 대고 원수까지 사랑하자는 게 예수의 제안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따스한 햇볕을 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신학을 공부할 때 자주 듣는 것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말마디다. 보편성은 획일화된 이념이나 가치의 확장과는 분명 다르다.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는 거리가 있다. 내 눈에 세상 어떤 것들은 어둠 자체고, 불의 자체며, 악함 그 자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 종류대로’ 서로가 서로의 관계 속에 머물고 있음을 즐긴다. 하느님에겐 대립이 아닌 조화가 정의고 선이다.(창세 1장 참조)

▲ '침묵', 오딜롱 르동. (1900)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가 원하는 건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익숙하게 외쳐 온 정의는 불의를 꺾어 놓는 데서 가능하고 세상이 힘주어 가르치는 선악의 구별은 악한 것을 제거하는 데서 가능하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이 희생당해야만 한다. 설사 희생당하는 것이 불의고 악함이며 어둠이라 할지라도 예수는 이런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서 대개의 사람들은 질문한다. ‘그럼 잘못된 것을 보고만 있으라고?!’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래, 보고 있는 것도 필요하지.’ 세상은 상대적인데, 절대적 선인 양, 절대적 정의인 양, 잘못된 것을 도려내면 예전보다 더 잘될 것인 양 호들갑이다. 신이 인간이 되어 왔어도 변하지 않는 게 세상이다. 한낱 윤리적 덕목이나, 법리적 해석으로 세상에 정의가 완전할 거라고 여기는 이는 어리석거나 배부른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선악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은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들의 호사스러운 취미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게 비쳐진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사랑, 은총, 정의 등등의 개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고유한 각각의 피조물들에 대한 존중과 제 스스로 절대적이라 되뇌이는 신념의 포기를 전제로 가능한 것들이다. 교회는 배려와 겸손으로 악한 이라도, 원수라도 보듬어 들이고자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 누구라도 외쳐 댈 수 있는 정의를 무한 반복 재생하는 ‘녹음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랑할 마음 없이, 갈라 세우고 따져 묻고자 하는 마음만 가득하다면 잠시 침묵하라. 그게 교회고 신앙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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